움직이는 손가락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문학 베스트 1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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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 작가를 들라면 애거서 크리스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나이들수록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추리 트릭이나 스릴러적 요소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 소설의 요소, 즉 로맨스나 세세한 시대 묘사 등이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손가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전쟁에서 다리를 다쳐 건강을 되찾기 위해 시골의 작고 평화로운 마을로 여동생과 함께 정양을 온 제리 버튼, 그러나 평화로와 보이던 라임스톡은 곧 익명편지와 살인사건으로 뒤숭숭해지고, 제리는 어느새 그 속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밝혀지는 범인은 언제나처럼 뻔하다면 뻔하고 의외라면 의외이지만 익명편지와 관련된 트릭은 꽤나 정교하다. 마지막에 미스 마플이 해결사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화자인 제리 버튼이고, 런던에서 성장한 그의 눈으로 본 시골 마을 라임스톡의 정경, 풍속, 사람들의 묘사가 흥미롭다. 1차대전 직후 영국 시골마을의 풍속사랄까.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로맨스 역시 작품 전체에서 여기저기 등장한다. 제리가 메간을 런던으로 데려가 신데렐라처럼 변신시키는 장면은 다소 진부하다면 진부하고, 반 페미니즘 적이라면 반 페미니즘 적인 구성인데도 읽을 때마다 미소를 짓게 된다. '침니즈의 비밀'의 버지니어를 연상시키는 쿨한 여동생 조안나의 로맨스도 흥미롭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커플 중에서도 특히 제리-메간 커플에게 호의적이 되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남녀간의 정열보다는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호의와 이끌림이라는 것 때문일까(사실 양자 중에서 어느 것이 사랑의 시작으로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지막 결말, 조안나의 기발한 결혼 선물 때문에도 많이 웃었다. 등장인물간의(특히 버튼 남매 사이의) 톡톡 튀는 대사를 읽는 것도 또다른 재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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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최인호 연작 소설 가족 7
최인호 지음 / 샘터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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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책을 처음 접한 건 아마도 중학생 때였나보다. '샘터'에 실린 연재분을 읽고 서점에서 단행본을 찾아 샀다. 그래서 나는 새로 나온 판이 아니라 초록색와 노란색으로 된(그리고 표지에 '家族'이라는 한자 글자가 심하게 촌스러운) 구판으로 '가족' 시리즈의 1,2권을 가지고 있다.

아..그때 그 1,2권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돌이켜보니 1,2권에서의 최인호는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아직도 문청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의 재기어린 표현들을 읽으면서 밤마다 웃어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솔직히 최인호의 다른 글들은 그닥 찾아 읽지 않았건만 '가족'은 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을 인내심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가족'은 놀랄만큼 오래동안 쓰여지고 있다. 최인호와 황정숙, 두 남녀가 대학에서 만나 연애를 하고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걸 해서 가족을 이룬 그때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다혜와 도단이가 태어나고 두 아이가 자라나고 그러면서 그 부모들이 늙어가고, 최근에는 다혜가 결혼해서 손녀딸까지 태어나는데까지 왔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세월은 흐르는 법이라 작가는 그 동안 어머니를, 큰누나를, 그리고 주변의 많은 이들을 영원히 떠나보내기도 했다. 하긴, 처음 '가족'을 읽을 때는 중학생이던 내가 벌써 처음 '가족'을 쓰기 시작할 때의 작가의 나이와 가까워지고 있다.

작게는 작가 자신과 아내와 아이들이 이루는 핵가족에서부터 어머니와 형제들, 조카들이 이루는 대가족의 이야기까지를 작가는 솔직하고(때로는 너무 솔직해서 가족들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재미있고 따스하게 그려주고 있다. 가족의 이야기란 다 그런 법이라 읽다보면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 하나, 젊었을 적 작가의 특징이던 재기발랄함이 나이들어감에 따라 인생에 대한 따뜻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래서 요즘의 글들은 그가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며 옷깃 스치는 우리 모두를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듯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아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흐뭇해지기도 한다.

작가의 딸인 다혜와 나는 같은 학년이고, 같은 대학을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식당에서 딸과 아내와 같이 있는 작가를 먼발치에서 보고 오직 이 시리즈 때문에 일방적으로 많이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다가가서 저 '가족'의 팬이예요, 라고 한 마디 던질 걸 그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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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관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3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용태 옮김 / 해문출판사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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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들 중 가장 전형적으로 탐정다운 이가 에르큘 포아로라면, 가장 탐정답지 않은 이는 빅토리아시대의 미덕을 그대로 갖춘 노부인 미스 마플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언밸런스로 인해 미스 마플은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탐정 캐릭터가 되었으며, 나 역시 그녀의 팬 중 한 사람이다.

이 '목사관 살인사건'의 진정한 매력은 '미스 마플'이라는 캐릭터가 최초로 등장해 이후 수많은 소설에서 미스 마플이 반복하는 '저 사람은 내가 사는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의 **를 연상하게 해요'라는 문구의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데 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작고 고즈넉한 시골 마을,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미스 마플의 말대로 '인간성이란 어디나 같은 것이라서' 세인트 메리 미드에도 음모와 배신과 치정과 심지어 살인도 있다.

세인트 메리 미드의 목사관 서재에서 교구위원이었던 지역 유지 프로즐로 대령이 시체로 발견되고, 그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미스 마플의 탐정적 재능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빛을 발한다(물론 이전에도 동네에서 없어진 새우를 찾아내는 등등에 그녀의 재능이 발휘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살인 사건의 플롯이나 트릭보다는 세인트 메리 미드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면면이 더 흥미를 끈다.

미스 마플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녀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야 할 작품. 참고로 후기작인 '패딩턴발 4시 50분'에 보면 미스 마플의 대사 중에서 청년이 된 글리젤더와 렌 목사의 아들 이야기가 등장하니, 이 소설에서 그녀가 이미 할머니였다 해도 이때는 그나마 젊은(?) 미스 마플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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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핫 Cool Hot 6 - 하트.비트.사운드
유시진 지음 / 코믹스투데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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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로 유시진을 꼽았건만, 한동안 그가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나 역시 만화 전반에 대한 애정도가 조금은 떨어지면서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러다 최근 다시 꺼내어 읽은 쿨핫 여섯 권, 새삼스레 내가 이 작품을 정말 좋아했었지, 라는 생각과 함께 정말 뒷권은 더 안낼 건가..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날짜를 챙겨보니 쿨핫이 처음 연재되기 시작했을 때가 벌써 7년전이다. 7년 전의 내가 쿨핫에 열광하면서도 가졌던 작은 불만은 '고등학생들이 정말 이런 생각을 하고 산단 말야? 난 대학 때도 이런 생각은 안 하고 살았는데..너무 비현실적이라구.'라는 것이었는데, 기묘하게도 7년이 지나서 읽으니 그런 식의 위화감이 많이 사라졌다. 어쩌면 7년 전의 나는 책 속의 그 아이들에게 조금쯤은 샘을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었다. 물론 쿨핫의 아이들이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들지 않지만, 이제는 만화 속의 주인공들이 실제의 그 또래집단을 대표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유시진의 만화 대부분이 그러하긴 했지만, 쿨핫은 특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어쩌면 상대에게 느낀 매혹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젊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루다가 동경이에게 느끼는 매혹, 준휘가 람이에게 느끼는 매혹, 람이가 루리에게 느끼는 매혹, 루리가 재련이에게 느끼는 매혹...이런 감정의 선들이 섬세하게 억살리면서 쿨핫의 그 독특한 향기로 우리들을 매혹시켰다.

6권 마지막의 명 나레이션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해도 놀랄 만큼 선명하면서도 마음 아련하게 하는 언어로 다시 표현해주는 유시진의 능력은 놀랍다. 그런데 독자를 이렇게 매혹시켜놓고 설마 이대로 뒷권을 내지 않을 생각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 6권이 나온 후 이미 몇년 간의 공백과 이것저것 손댔던 다른 작품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나는 이 작가가 부디 '게으르고 무책임한 천재'로 남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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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연인
권현숙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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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숙의 전작 '인샬라'를 읽고 '내가 읽은 최고의 연애소설'이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루마니아의 연인'을 읽고 나니 그 평가를 작가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고 말이다(물론 여기서 내가 말하는 연애소설이란 쟝르의 법칙이 도식화 되어 있고 그 도식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위 '로맨스소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 조선의 전쟁 소식이 들려오는 1950년대 초반, 사범학교를 막 졸업한 루마니아 처녀 마리아 에네스쿠는 북조선에서 온 전쟁고아들을 위해 세워진 시레뜨 조선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조선 청년 김명준을 만나고, 두 사람은 천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게 사랑에 빠진다. 둘은 몇년을 기다린 끝에 어렵게 어렵게 양국의 결혼허가를 얻어내어 결혼하고 북한으로 돌아와 예쁜 딸을 낳아 행복한 몇 년을 보낸다. 그러나 마리아는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돌아갔던 루마니아에서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인해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루마니아에서 홀로 40여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명준과 재회한다..

시간상으로는 50여년에 걸쳐 있지만, 소설의 대부분은 마리아와 명준이 함께 보낸 시간에 맞추어져 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떻게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행복했는지가 마리아의 시선으로, 권현숙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국 전쟁 직후 북한 고아들이 동구권 국가로 교육을 위해 잠시 맡겨졌다는 역사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지만, 실화에 근거한 소설 답게 그 루마니아의 조선학교와 당시 루마니아 사회의 묘사 역시 그야말로 농밀하다.

명준이 외국인, 그것도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나라 출신의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은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떨어져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명준에게 보내는 마음은 한결같이 지고지순하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40년을 소식도 없는 꼬레아 남편을 기다리며,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혼자 힘으로 한국어-루마니아어 사전을 만들면서 기다릴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어쩌면 마리아는 우리 대부분보다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권현숙은 작가적 상상력 역시 마음껏 발휘해 보석같은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두 연인의 상황이나 당시의 사회적 정세는 상당히 암울했음에 틀림없었을 텐데도 두 사람의 사랑은 충분히 아기자기하고 영롱하다. 사랑 그 자체의 빛과, 우울한 무기력한 이방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능력과 성의를 갖춘 남자주인공 탓이다. 인샬라의 승엽에 뒤이어 권현숙은 '김명준'이라는 모든 여자의 이상형이 될 만한 남자 주인공을 다시 그려내었다.

읽는 동안, 강렬하고 향기 강한, 그러면서도 오래동안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압도되었다. 함께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생각할 때마다 올 겨울, 마음 속에 작지만 뜨거운 불꽃 하나, 아직 사랑을 믿게 해주는 그런 불꽃 하나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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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벤치 2004-03-2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이 제가 했던 말과 같아서 들어왔답니다 제 숨겨둔 연인은 그러지요 '날 만날때까지 제발 늙지말라'고 . 그래서 저는 마음놓고 늙지도 못하고 있답니다, 여기 미국 콜로라도 땡볕아래서 조차 ... 잘 읽고 갑니다

Livia 2004-03-2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아님,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제목은 극중 마리아가 명준과 떨어져 지내면서 중얼거리는 독백중의 일부인데, 가슴에 많이 와닿지요? 소설 속에서 마리아와 명준이 결국 재회한 것처럼, 항아님도 숨겨둔 연인과 다시 만나실 날이 곧 오기를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