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 전10권 세트 - 개정판 그린게이블즈 앤스북스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전에도 어린이용의 얇은 책은 어느 전집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앤(e자가 붙은!!)과 내가 제대로 만난 것은 어느 책 외판사원의 실수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 사람에게 주문하신 건 ‘왕비열전’이었는데, 막상 집에 도착한 건 예전 동서문화사의12권짜리 하얀 북커버의 “빨강머리 앤” 시리즈였으니까. 그리고 책이 잘못 왔다는 연락을 받고도 한 달 쯤 후에야 집으로 찾아온 그 외판사원은 그 사이 내 손때가 여실히 묻어버린 책을 보면서 싸게 드릴 테니 그냥 읽으시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게, 내 소녀시절을 지배한 그 책은 내 것이 되었다. 마치 애초에는 남자아이 대신 잘못 보내진 앤이 그대로 그린 게이블즈의 아이가 되었듯이.  


앤의 어린 시절을 다룬 잘 알려진 첫 권은 물론, 앤이 대학을 가고 교사가 되고 길버트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의사의 아내로 여섯 아이를 키우는 그 길고 긴 이야기를, 그야말로 얼마나 즐겁게, 얼마나 여러 번 읽었던지. 수많은 책들이 내 마음 속 책장에 꽂혀 있지만, 그 책장에서도 자리를 따로 만들어주어야 할 책이 있다면 이 책일 거다. 오죽하면 나중 영어 원본을 구했더니 영어를 잘 해서가 아니라 한국어 문장 하나하나를 다 외고 있어서 영어책을 읽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무엇이 그리도 나를 매혹했을까. 내가 훌쩍 나이가 들고 보니 앤을 보고 저렇게 말 많고 지나치게 감수성 강한 아이가 있을까, 하고 혀를 차는 머릴러의 마음을 알 듯도 하지만 어렸을 때의 나도 앤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온갖 백일몽을 꾸고, 장소마다 이야기를 만들고, 어른들이 시끄럽다고 할 정도로 재잘거리고. 그런 아이에게 나보다 한층 더 한 책 속의 앤은 참 친근하고 안심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엉뚱한 아이가, 부모없는 쓸쓸한 고아였던 아이가 참으로 잘 자라서 애번리에서, 그리고 더 큰 세상에서도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마음 놓이고 즐거운 일이었고.  


거기에 앤의 이야기는, 단순히 소설로서만의 매력만이 아니라 당시 캐나다 시골마을의 생생한 풍속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한참 뒤, 앤이 나이가 들고 막내딸 리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편은 1차대전 시기 후방의 생활사라해도 좋을 정도다  


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뒤로 갈수록 ‘지나치게 주인공을 이상화해서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 버렸다는 이 시리즈지만, 오랜 친구의 허물이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인다 해도 기꺼이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처럼 내게는 이 책이 여전히 정겹다. 무엇보다도 앤의 그 인생관, 내가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세상이 좀 더 나은 장소가 되게 하고 싶다는 인생관은 꿈 많고 이상적인 소녀시절이 지난 지 오래건만, 아직도 내게 유효하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다면, 거기에는 이 책의 공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책 속의 앤이, 그리고 앤을 창조한 몽고메리 여사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진심으로 기뻐해주지 않을까.

(수없이 번역되어 나온 앤 시리즈 중에 박순녀 번역의 옛 동서문화사(지금 저 시리즈를 내고 있는 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와의 관계가 무척 궁금하다)의 흰색 하드커버 12권 버전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리즈가 절판된 와중에 시중에 구할 수 있는 완역판이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몽고메리의 책을 앤 시리즈 말고도 모두 번역해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한데..번역과 교정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이번 버전도 어느 정도 이상은 해주고 있고 권할 수 없는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이전 번역이 너무 깔끔하고 내게는 익숙했던 탓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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뱌무 2010-02-1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 책 누군가에게 선물로 준 기억이 난다. 나도 샀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