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연인
권현숙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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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숙의 전작 '인샬라'를 읽고 '내가 읽은 최고의 연애소설'이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루마니아의 연인'을 읽고 나니 그 평가를 작가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고 말이다(물론 여기서 내가 말하는 연애소설이란 쟝르의 법칙이 도식화 되어 있고 그 도식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위 '로맨스소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 조선의 전쟁 소식이 들려오는 1950년대 초반, 사범학교를 막 졸업한 루마니아 처녀 마리아 에네스쿠는 북조선에서 온 전쟁고아들을 위해 세워진 시레뜨 조선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조선 청년 김명준을 만나고, 두 사람은 천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게 사랑에 빠진다. 둘은 몇년을 기다린 끝에 어렵게 어렵게 양국의 결혼허가를 얻어내어 결혼하고 북한으로 돌아와 예쁜 딸을 낳아 행복한 몇 년을 보낸다. 그러나 마리아는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돌아갔던 루마니아에서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인해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루마니아에서 홀로 40여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명준과 재회한다..

시간상으로는 50여년에 걸쳐 있지만, 소설의 대부분은 마리아와 명준이 함께 보낸 시간에 맞추어져 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떻게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행복했는지가 마리아의 시선으로, 권현숙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국 전쟁 직후 북한 고아들이 동구권 국가로 교육을 위해 잠시 맡겨졌다는 역사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지만, 실화에 근거한 소설 답게 그 루마니아의 조선학교와 당시 루마니아 사회의 묘사 역시 그야말로 농밀하다.

명준이 외국인, 그것도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나라 출신의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은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떨어져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명준에게 보내는 마음은 한결같이 지고지순하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40년을 소식도 없는 꼬레아 남편을 기다리며,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혼자 힘으로 한국어-루마니아어 사전을 만들면서 기다릴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어쩌면 마리아는 우리 대부분보다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권현숙은 작가적 상상력 역시 마음껏 발휘해 보석같은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두 연인의 상황이나 당시의 사회적 정세는 상당히 암울했음에 틀림없었을 텐데도 두 사람의 사랑은 충분히 아기자기하고 영롱하다. 사랑 그 자체의 빛과, 우울한 무기력한 이방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능력과 성의를 갖춘 남자주인공 탓이다. 인샬라의 승엽에 뒤이어 권현숙은 '김명준'이라는 모든 여자의 이상형이 될 만한 남자 주인공을 다시 그려내었다.

읽는 동안, 강렬하고 향기 강한, 그러면서도 오래동안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압도되었다. 함께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생각할 때마다 올 겨울, 마음 속에 작지만 뜨거운 불꽃 하나, 아직 사랑을 믿게 해주는 그런 불꽃 하나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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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벤치 2004-03-2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이 제가 했던 말과 같아서 들어왔답니다 제 숨겨둔 연인은 그러지요 '날 만날때까지 제발 늙지말라'고 . 그래서 저는 마음놓고 늙지도 못하고 있답니다, 여기 미국 콜로라도 땡볕아래서 조차 ... 잘 읽고 갑니다

Livia 2004-03-2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아님,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제목은 극중 마리아가 명준과 떨어져 지내면서 중얼거리는 독백중의 일부인데, 가슴에 많이 와닿지요? 소설 속에서 마리아와 명준이 결국 재회한 것처럼, 항아님도 숨겨둔 연인과 다시 만나실 날이 곧 오기를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