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에 이어서)

물론 이른바 ‘나쁜 일’, ‘좋은 일’은 보통 사람의 눈에 비친 개념일 뿐, 진정 덕을 갖춘 사람의 눈에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 자체가 없다. 그들은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할 뿐이며, 도의 원칙을 따르므로 행한 일이 모두 좋은 일에 부합할 뿐이다. “높은 덕은 덕이 아니라 한다”, “높은 덕은 하지 않으니 인위적인 것이 없다”는 말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좋은 일을 할 때 좋은 일을 하고자 인식하지 않으며, 스스로 좋아하고 모두가 좋아하므로 흥이 나서 기꺼이 행한다. 일을 행하고 다른 사람이 모두 그를 좋은 사람이라 칭찬하면 그는 오히려 답답해진다. 내가 좋은 사람인가? 좋은 일을 했는가?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마음씨가 곱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부자가 있었다. 어느 해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집과 일터를 잃고 노숙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자가 이를 보고 마음 아파하며, 집을 지으면서 특별히 처마를 크게 만들었다. 유랑자들에게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집이 다 지어지자 과연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부자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자 그의 가족과 가난한 사람들 간에 말다툼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이듬해 겨울 어느 저녁 한 노인이 처마 밑에서 얼어 죽었다. 부자의 가족과 다투었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부자에게 인덕이 없다며 손가락질했다. 얼마 후 태풍이 불어와 부자의 처마가 날아갔다. 부자의 가족과 반목하던 사람들은 하늘이 벌을 내렸다며 고소해했다.
부자는 다시 집을 새로 지으면서 처마를 작게 만들고, 남은 돈으로 작은 집을 한 채 더 지었다. 초라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피난처가 될 수 있었으니, 모두가 부자의 넓은 도량에 감격했다.


이 부자는 좋은 사람인가? 아마도 아직 부족할 것이다. 자신은 큰 집을 지으면서 남에게 처마 하나만 내주었고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는 다툼까지 벌였으니 말이다. 훗날 집을 다시 짓고도 작고 초라한 집 한 채만을 더 지었을 뿐이지 않은가. 두보는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면 넓고 큰 집 천만 칸을 마련하여 세상의 춥고 가난한 사람 모두 기쁜 얼굴 갖게 할까.” 얼마나 배포 있는 좋은 생각인가! 이에 비하면 부자가 베푼 선행은 별 것 아니다. 하지만 두보는 말에만 그쳤을 뿐이다. 자신도 낡은 초가집밖에 없었으니 남을 위해 ‘넓고 큰 집 천만 칸’을 마련할 여력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부자는 작지만 실질적인 선행을 베풀었는데 말이다.


노자의 기준에 따르면 부자는 진정 덕을 갖춘 사람은 아니다.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측은지심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스스로 편안해지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먼저 가족의 생활을 살피고 난 후 타인을 생각했고, 능력이 닿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은 일을 행했다. 하지만 그가 남에게 베푼 작은 집은 대부호가 남을 위해 지은 ‘넓고 큰 천만 칸’과 본질적으로는 같다. 불가의 관점을 빌리자면, 이 둘은 똑같은 공덕을 세웠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이 있다. 이는 인, 의의 범주에 속하며 그 경지가 오히려 부자에 이르지 못한다.


요컨대 노자는 좋은 일을 하라든지,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본심을 다해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독려할 뿐이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나쁜 일 하기를 좋아한다면 어찌할까?


이는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면 일찍 그친다”고 하지 않았는가. 끝이 멀지 않을 것이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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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어록
높은 덕은 덕이 아니라 하니 이로써 덕이 있다고 하고,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로써 덕이 없다고 한다. 높은 덕은 하지 않으니 인위적인 것이 없고, 낮은 덕은 억지로 행하니 인위적인 것이 있다. 높은 인(仁)은 억지로 행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없고, 높은 의(義)는 억지로 행하여 인위적인 것이 있다. 높은 예(禮)는 억지로 행하니 그것에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강요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를 덕이라 하고, 덕을 잃은 후를 인이라 하며, 인을 잃은 후를 의라 하고, 의를 잃은 후를 예라 한다. 무릇 예는 충(忠)과 신(信)이 얄팍해진 것이며 혼란의 시작이고, 먼저 아는 것은 도의 화려함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런 까닭에 대장부는 그 두터움에 거하며 얄팍함에 머물지 않고 그 실속 있음에 거하고 화려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형식적인 ‘덕’을 추구하지 않으니, 이를 진정한 ‘덕’이 있다 한다. 낮은 덕을 갖춘 사람은 ‘덕’의 요구를 어기니 이는 진정한 ‘덕’이 아니다.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덕을 행하지만 덕이라 생각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행한다. 낮은 덕을 갖춘 사람은 일부러 도덕을 추구하며 억지로 행한다. 높은 인을 갖춘 사람은 의식하지 않고 인애(仁愛)를 베풀며, 높은 의를 갖춘 사람은 일부러 인애를 표현하고 이를 행한다. 높은 예를 갖춘 사람은 일부러 도덕, 인애를 표현하되 만일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면 분노하며 도덕과 인애를 던져버린다.

 

그러므로 도를 잃으면 이른바 덕이 필요하고, 덕을 잃으면 이른바 인이 필요하고, 인을 잃으면 이른바 의가 필요하고, 의를 잃으면 이른바 예가 필요하다. 예라는 것은 사람이 충과 신의 뿌리를 잃은 후 남은 폐허와 같을 뿐이니 재앙의 시작이며, 총명한 사람이 주워 올린 도의 빈 꽃일 뿐이니 우매한 길의 시작이다. 대장부는 뿌리에 거하되 폐허에 머물지 않고, 열매를 따되 공허한 꽃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스스로 선견지명이 있다고 여김은 도의 겉치레이며 우매함의 시작일 뿐이다.


노자의 경지는 참으로 높다. 천신만고 끝에 산에 올라 이제 다 올라왔다고 느끼는 순간 고개를 들면 더 높은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호의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선의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데, 이제 보니 그것은 그저 도의 잔재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가 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선의로 일할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사실 이는 부차적인 선택일 뿐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노자의 말은 확실히 옳다. 사람이 도를 잃으면 자연의 규율을 알지 못하고 눈앞이 어두우니 덕의 불을 켜 마음을 밝혀야만 한다. 덕은 본심에서 우러난 진정한 선이다. 즉, 불가에서 말하는 ‘자신을 제도하고 남을 제도한다’, ‘스스로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훌륭한 보살 정신이기도 하다. 자신을 크게 하고 자기 제도를 실현해야만 남을 제도한다 할 수 있고, 자신을 부양해야만 남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덕은 선한 마음, 선행 행위뿐 아니라 지식, 지혜, 진취적인 정신 등 많은 것을 포함한다. 덕을 잃으면 밝게 비추는 것이 없으니 모두가 어둠 속에서 헤매며 부딪히고 넘어져 다칠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부축하고 서로 도울 인이 필요하다. 다정함이 무엇이고, 선의가 무엇인가! 인이야말로 세 번째의 가치다. 많은 사람들이 사심을 품고 인애의 마음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타인의 고통을 본 체 만 체 수수방관하며 “자기 집 앞 눈은 자기가 치우고, 남의 집 기와의 서리를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한다. 이때가 바로 의가 필요한 때이다. ‘의’의 원칙은 같은 ‘도’로 서로 돕고 같은 ‘기질’을 서로 추구하는 데 있다. 여기에 이르니 이미 널리 베풀지 못하고, 몇몇의 대상을 겨냥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의조차 갖추지 못하고 이롭지 않다.

 

그럼에도 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으며, 심지어 배은망덕하게 행한다. 여기에 이르면 사회의 인심은 필연적으로 혼란해지고 사방에서 다툼이 일어나니 어찌할까? 이때가 바로 예가 필요할 때이다! 예는 법률, 기율, 제도 외에도 예의, 예절 등 명문화된 규정이나 약정된 규칙을 포함한다. 요컨대 사회의 모든 행위를 총괄하는 종합규범이며, 영리한 사람들이 정한 ‘게임규칙’이다. 자발적인 선을 잃고 규칙으로 마음속의 악을 제약해야 한다면 사회가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자는 결코 ‘법치’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현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예는 다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는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진정으로 도덕을 갖춘 사람은 법률의 제약 없이도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제안 없이도 선한 일을 행한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도덕을 제창하는 근본적인 목적이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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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낙원에서는 모든 꿈이 현실이 된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사람들은 아무런 위험도 없는 낙원 같은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낙원은 지루하다. 우리 인간에게 맞지 않는다.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위험과 도전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있음을 근본적으로 느끼게 한다.

 




-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엘링 카게 -

 
 

다이아몬드 세공사는 거친 돌을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로 만듭니다.
도예가는 점토를 멋진 꽃병으로 만듭니다.
세상이 모두 완전하다면 다이아몬드 세공사나 도예가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바뀌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조직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멋진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행복한 경영이야기 http://www.happyce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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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탐험가이야기에서 소개해 드릴 인물은 어네스트 섀클턴입니다.

 

일단 백과사전의 이력부터 볼까요?

 

 



 

 

어니스트 섀클턴 [Ernest Henry Shackleton, 1874.2.15~1922.1.5] 

 

영국의 남극 탐험가. 1909년 남위 88°23'에 도달, 당시까지 인류가 도달할 수 있었던 최남단에 이르렀다. 이 탐험에서 남자극 발견, 에러버스 화산 조사 등 학술상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아일랜드의 킬키어 태생이다. 덜위치칼리지를 졸업하고, 1901년 로버트 스콧(Robert F. Scott)을 따라 남극을 탐험하였다. 1907년 탐험대를 조직하여 님로드호(號)로 남극 탐험에 나섰다. 1909년 1월 9일 남위 88°23'에 도달하여, 그때까지 인류가 도달할 수 있었던 최남단에 이르렀다. 이 탐험항해에서 남자극(南磁極)을 발견하였고, 에러버스 화산(火山)을 조사하는 등 학술상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이 탐험의 공로로 1909년 11월 9일 에드워드 7세의 탄생기념일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14년 인듀어런스호로 재차 남극을 탐험했으나 중도에 웨들해(海)에서 빙산을 만나 난파, 선원 5명과 함께 6.6m 길이의 작은 보트를 타고 1,280km 떨어진 사우스조지아섬으로 구조를 청하러 가, 엘리펀트섬에 남겨두고 온 전 승무원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21년 3번째로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으로 향했으나, 중도에 사우스조지아섬 앞바다에서 심장병 발작으로 죽었다. 왕립지리학회 외에 많은 상을 받았다. 저서에 《The Heart of the Antarctic》(1909), 《South》(1919)가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사실 사전상의 이력만 보면, 앞서 소개했던 과거의 위대했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나 로버트 스콧에 비해 약간은 초라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요, 신체조건도 강하지 않았고, 당시에는 명성도 없었으며, 남극 탐험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었던 섀클턴이 역사상에 손꼽히는 위대한, 신이 내린 리더라고 평가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역사속 9인의 리더에게 배우는 서른살 리더십'에 실려있는 섀클턴에 관한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어려움이 따랐지만, 순조로운 항해였다. 남극권에 들어설 무렵까지만 해도 섀클턴과 탐험대원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고난이 닥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배가 거대한 부빙에 갇혀 난파되고, 그 후로 2년에 가까운 세월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듀어런스 호는 목적지를 150km 앞두고 얼어붙은 바다에 갇히고 침몰하고 만다. 그리고 섀클턴과 선원들의 생존과 귀환을 위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신이 내린 리더라고 불리는 섀클턴의 리더십은 이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섀클턴은 난파된 선실을 개조하고 ‘리츠’라는 고급 호텔의 이름을 붙였다. 배를 수리하고, 요리를 하고, 개를 훈련시키고, 과학자들은 연구를 진행하도록 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일을 손에서 놔버리게 되는데, 그것은 곧 무기력함과 더 깊은 절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섀클턴은 탐험대원들에게 각자의 업무를 계속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또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자체 게임을 개발하면서 지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깊은 믿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어느 누가 영하 40도에 이르는 얼음덩어리 위에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읽거나, 축구를 하거나, 체스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난파된 배와 함께 말이다.

 

 

 

 



 

어느 밤, 비상식량과 조랑말 고기로 부실한 식사를 하고 난 다음, 섀클턴은 자기 곳의 비스킷 4개 가운데 1개를 와일드에게 주며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 “이 수간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자상하고 호의적인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와일드는 자신의 노트에 줄까지 쳐가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비스킷이었다. (중략) 처절한 시련을 겪은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섀클턴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그는 위기의 상황이 닥칠 때마다 빠른 판단으로 다음 행동을 선택했다. 무모하다고 여겨지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탐험대원들의 절대적인 복종과 믿음을 이끌어냈다.

 

섀클턴의 리더십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그는 뚜렷한 비전을 가졌고, 자신의 가능성과 희망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서 실천하는 행동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팀원들 간의 따뜻한 공감대를 형성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는 ‘삶’과 ‘인간’을 사랑할 줄 알았던 열정적인 로맨티스트였다. 그는 결코 선천적이거나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리더십이 최악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 게 아니었을까?

 

- 역사 속 9인에게 배우는 평생 경쟁력, 서른살 리더십 중에서 -

 

 

오늘날 섀클턴이 뛰어난 탐험가를 넘어 역사 속의 위대한 리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는데요, 국가와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눈앞에 명예와 업적을 과감히 포기할줄 알았고, 2년동안이나 혹한의 추위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자신뿐만 아니라 탐험대 모두에게 동기부여가 되도록 하여 끝내 모두 생환토록 했으니, 그 어떠한 위대한 발견이나 탐험보다도 값질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참고서적~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엘링카게 지음, 강성희 옮김)

탐험가로서 3극점을 최초정복한 뒤 변호사,CEO,수집가,아버지로 인생에 도전하다!

 

역사 속 9인의 리더에게 배우는 평생 경쟁력 (백기락 지음)

더 늦기전에 배워야할 서른살 리더십! 불굴의 의지로 위기를 이겨 낸 역사 속 위인 9명에게 경쟁력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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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 등 3극점을 홀로 걸어서 밟은 엘링 카게에게 기자가 물었다.

“극지 탐험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아침에 제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타임지로부터 ‘모험의 한계를 밀어내고 있는 현대의 탐험가’라는 극찬을 받은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라니….

텐트 안에서 눈을 떠 살을 에는 매서운 날씨,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부상과 질병을 떠올리면 슬리핑백 속에 머물고 싶을 뿐이다. 슬리핑백을 훅 차고 일어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공포영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라고 엘링 카게는 말한다. 조금 더 잠을 자고 싶은 유혹을 극복하고 나면 100㎏에 달하는 짐을 끌며 몇 ㎞를 홀로 행군하는 사투는 의외로 순조롭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극찬하는 위대함에 대해 카게는 자진해서 제때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아낸 덕분이라며 일단 시작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해도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대로 인생을 따라가는 대신 ‘자진해서’ 인생을 탐험하는 사람들이야말 어느 극지탐험가보다도 위대하다고 덧붙였다. 카게에게 용기란 세상의 조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이 용기 덕분에 그는 남들이 가지 못한 세 곳의 극점에 도달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포커스 박영순 기자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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