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민음사, 알라딘, 은행나무 (가나다 순)가 함께 진행한 장강명 소설 리뷰대회의 심사평을 공유합니다. 심사 및 심사평은 문학평론가 강지희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1등

추리닝간죵님

<나의 세계를 증명하는 등식으로써 당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blog.aladin.co.kr/795816154/7794062


  한 작가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소설들 사이에는 질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세 장편 소설의 리뷰를 읽어 내려가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한 권의 장편은 그 작가의 눈으로만 포착되는 주관적인 현실을 정교하게 구축해놓은 하나의 소우주다.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 세계와 만날 때에만 우리는 잠시 겹눈이 된다. 그러니 책장을 덮은 후에 그 작가가 만들어냈던 소우주 속으로 다시 한번 빠져들어가 유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좋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더 매혹시키는 것은 소설의 지평을 딛고 펼쳐지는 겹눈의 공간 속 유일무이한 또다른 소우주에 도달하는 글들이다. 이런 면에서 츄리닝간죵의 <나의 세계를 증명하는 등식으로써 당신>은 압도적이었다. 마지막에 던져진 여자의 질문을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아 소설을 읽는 방향을 바꾸어냈고, 그 의미를 아름다운 방향으로 증폭시키며 ‘존재를 소멸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등식으로써의 기억’이라는 명제를 도출해냈다. 때로 기억한다는 사소한 행위만이 우리의 존재를 지탱시키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일이 된다는 진실을 이보다 더 유려하게 설득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2등 

오규원님<행복의 근원을 묻다> (한국이 싫어서)

http://blog.aladin.co.kr/771489177/7755052


2등 

faust715 님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 (호모도미난스)

http://blog.aladin.co.kr/778649103/7796572


  오규원의 <행복의 근원을 묻다>는 글에서 묻어나는 슬픔의 어조가 인상적인 리뷰였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난 많은 사람들이 최근 ‘헬조선’으로 압축되는 온갖 끔찍한 면면들에 대해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소설이 사회 비평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그러나 날카로워지는 만큼 반드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프리카에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던 한 친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날카로움 대신 동감하는 아픔을 조심스럽게 눌러담는 길을 택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동반되는 끝없는 불안감에 대해 말하고,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여러 방향에서 행복의 길을 찾게 되는 것에 작은 안도감을 표시하는 이 글의 담담함이 소설에 더 깊이 도달하는 또다른 길을 틔워주고 있어 좋았다. faust715의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는 『호모도미난스』에 나타난 힘을 가진 자의 책임감과 정당성에 대해 성찰하는 데 있어, 히어로물 영화의 사례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비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실존적 고민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미성년과 만났을 때 왜 더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섬세하게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3등 

얼룩님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blog.aladin.co.kr/mydewy/7797204


3등 

달문님

<적응하거나 혹은 견디지 못하거나> (한국이 싫어서)

http://blog.aladin.co.kr/dalmoon33/7763029


  얼룩의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선명하게 읽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글이었다. 인물들 안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흐려지는 순간과, 지명에 대한 전승의 검증 과정에서 가짜 이야기가 진짜 기억이 되어버리는 지점의 난감을 겹쳐 읽는 세심함도 눈에 띄었지만, 이를 소설에 국한시키지 않고 때때로 삶 속에 찾아드는 죄의식과 살아갈수록 줄어드는 말로 이어받는 부분의 성찰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늘한 소설 앞에서 처연한 얼굴이 된 자신의 표정을 기술하는 마지막 문단 역시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달문의 <적응하거나 혹은 견디지 못하거나>는 『한국이 싫어서』에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장강명의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한국을 혐오하거나 호주 이민 성공 사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 충실한 ‘선택’이었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설사 그것이 도피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 움직이는 과정에 서린 용기 자체가 결론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다이 시지에 소설과의 대비 역시 흥미로웠다.  



장려:  (필명 가나다 순)

      꼼쥐님 <삶의 원동력이 희망인 이유> 

      돈다돌아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헤브 어 나이스 데이”>

      로렌초의 시종 <속죄를 감당하는 방식> 

      봄밤 <타인을 향한 이해를 비로소,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 <우주 알을 기다리며> 

      용이 <호모도미난스(지배하는 인간)>

      탄산수킬러 <이것이 진짜 ‘자기계발서’다>

      헤르메스 <기억과 윤리> 

      guiness <다음 단계의 인류를 상상하다> 

      hope&joy <서늘한 새벽, 따뜻한 빛을 닮은 그들> 


  소설에 대해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펜을 들어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조금 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오랜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간절함, 거기에 서려 있는 온기 같은 것들이야말로 생을 지탱시키는 것이라 믿기에 많은 리뷰들을 읽는 시간이 고단하기보다 행복했다. 순위를 매겨야만 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글에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진솔함이 서려 있었다고 꼭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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