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 김사인 지음 / 2015년 1월 15일 발행


김사인 시인은 등단 후 세 권의 시집을 냈다. 1987년 <밤에 쓰는 편지>, 2006년 <가만히 좋아하는>, 2015년 <어린 당나귀 곁에서>. 조심스러운 시력만큼, 그의 시 역시 무척이나 섬세하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낱말이 시인을 만나 시가 된다.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그런 문장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만들어내는 울림. 그가 그리워하는 이들, 그가 시에 담은 이들의 모습도 꼭 그렇다.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김태정, 부분)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달팽이처럼, 시는 말을 거르고 또 거른다. 드문드문 이어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고요한 시의 길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져도' 계속될 서정이 이어진다. 애처롭고 마음이 쓰이는 풍경들이다. 동료 시인 김태정은 1963년 태어나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넋을 거둔 미황사를 떠올리며 시인은 태정에 대한 기억을 추억한다.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고 다니던,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던 사려 깊은 시선.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바짝 붙어서다, 부분)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의 모습처럼, 그렇게 달팽이처럼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밀차를 밀며 살았을 할머니의 삶을 상상하면, 어린 염소처럼 할머니의 발꿈치를 따를 밀차의 바퀴에 이입하게 된다. 밀차라도 그곳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생각, 할머니의 졸아든 몸을 발견한 시인이 있어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부터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화양연화, 부분)


시인은 떠난 이를, 떠날 이를 반복해 곱씹는다. 그가 자신의 '눈멀고 귀먹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압도적 비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속절없음을 속절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그렇게 떠난 이들을 시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집을 통해 애도한다. 품격있는 애도의 풍경은 결정적인 애도의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의 어머니에 관한 시.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 하는 아들 대견해하며,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물어봐도 주세요.

너 피곤한데 내가 자꾸 붙잡고 얘기가 길다, 멋쩍게 웃으시며, 그래도 담배 하나 더 태우고 건너가세요 어머니.


3

혹시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낙타들과 놀고 계시나요.

꾀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나요.

빨갛게 그을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나요.


그럼 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꼭 당신을 다시 만나자는 건 아니지만

달아나는 돌들과 자꾸만 뒤로 숨는 풀들과

봉분 위로 부는 바람 하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고비사막 어머니, 부분)




콩국수, 수박, 머루술 같은 일상의 소박한 음식의 이미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별한 날만 만날 수 있는 독하고 화려한 맛이 아니었다. 오래 기억에 남을 맛처럼, 그렇게 어머니의 기억은 일상이 되어 머무를 것이다. 몹시도 작았을 어머니의 몹시도 작은 찻숟갈을, 작은 웃음소리를 시인은 조용히 불러본다. 사막을 건너는 어머니의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고비사막을 건너 이 세상을 떠났을 어머니에게 건네는 나직한 인사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에 이르면 슬픔을 참기가 어렵다. 이토록 서정적인 시인이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깊고 수수하고 능청스럽다. 어떤 시는 매섭고, 어떤 시는 절로 웃음이 난다. 고맙고 서러운 생에 대해 드믄드문 말하는 시들이 담아낸 섬세한 이미지들이 이어진다. 당나귀의 걸음처럼 터벅터벅 이어지는 글을 읽다보면 꼭 시처럼 고요한 시인의 음성이 떠오른다. 모국어를, 한국어를 육십여 년 가까이 쓰고서도 이정도 밖에 쓰지 못해 부끄럽다고 말하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그런 그가 몹시도 고민하며, 더듬더듬, 먼길을 한없이 느리게 그리며 놓았을 시의 길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김사인, 어린당나귀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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