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 안현미 지음 / 

 2014년 5월 21일 발행




안현미의 시집 <곰곰>에서 그가 묘사한 사랑은 독하기 짝이 없었다. 동맥을 오리고 삭발을 감행하는 사랑.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도 아니었지 그냥 지상에서 가장 높은 방에 서로를 모셔두는 일이었지" (옥탑방 中)이라고 회고하는 사랑의 모습. 독하고 처연했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中)라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밤을 보내야 했을지를 상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안현미가 "저 파랑, 저 망망!"(최치언 추천사 중)이라고 소개되는 시집을 엮었다.


누나......나...... 내일부터 꽃을 준 여자랑 연애할 거예요 밑바닥에서 사랑까지 생을 바꾸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사랑 묵묵부답인 사랑 마네킹 같은 사랑...... 위상공간 같은 지옥과 싸이버 같은 천국을 하루에도 수십차레 왔다 갔다 하는 사랑 꽃이, 꽃이, P지 않는 사랑...... (중략) 그러니 누나...... 봄이나 기다리며 생을 낭비하자던 약속 같은 건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나 버려줘요......


(이별수리센터- P에게 中)


청자를 특정한 연서, 아마도 마지막일 편지는 단정하고 경쾌하다. 꽃을 준 여자와 연애를 하고, 꽃을 준 여자와 여행을 할 거라는 화자의 다짐은 즉흥적이고 가볍고 쾌활하다. 그가 경험했을 사랑은 수리해야 할 사랑이다. 수리가 필요한 지점에 "변증법적인 단게를 거쳐 서른이 되고 싶다"고 했던 헛된 말이 있고, "우리 모두 미래의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텅 빈 말이 있다.


<꽃이, P지 않는> 사랑이라는 재치있는 수식은 경쾌하다. 자신의 사랑이 열매맺지 못함을 인식하기까지, 도저한 사랑이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달구어야 했을까. 괴로움이 없는 상태의 경쾌함이 아닌, 괴로움을 뛰어넘은 경쾌함이라 더욱 마음을 울린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는 화자의 추신은 이 경쾌한 화법에도 불구 일종의 선언처럼, 예언처럼 들린다. 



포도나무가 있는 여인숙에 홀로 투숙한 여행객의 고독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매일 아침 자신을 속이는 어떤 허무처럼 일인용이고 일회용인 한개도 재미없는 삶처럼 그리하여 죽음처럼 글렌 굴드를 듣는다 출근과 퇴근, 누가 만든 미로일까? 당신은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다 당신이 없는 겨울을 거울처럼 들고 사랑의 부재 또한 사랑 아니겠는가 


(그도 그렇겠다 中)


고통도 지나가고, 슬픔도 지나가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이렇게 한 해의 절반이 갔다.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는 나날. 어느날 수리될 나날을 기약하며 다음 어느날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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