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의 소설이 세련되지 않았던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천년대 초반에 데뷔한 작가는 2013년에 이르기까지, 항상 최첨단 감성을 유지했다. 1994년, 반포로 돌아간 정이현의 소설은 그 시절, 끝내 헤어져야만 했던 세 친구의 우정에 대해 더는 뺄 것이 없는 날렵한 문장으로 치밀하게 고증해낸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다. 폭염으로 인해 3384명이 죽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을 살았다. 스무살이 되려면 1997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세 아이들, 졸부의 손녀이자 결손가정의 딸인 세미와 무엇이든 기억하는 아이 지혜, 뚜렛 증후군 때문에 반복적으로 욜설을 내뱉는 아이 준모. 이들은 '모종의 비밀'을 나누고 그 시절과 작별하기까지, 애틋한 우정을 이어나간다.
"이 한해가 지나면 준모와 지혜 그리고 나는 정말로 먼 타인이 될지도 몰랐다."(215쪽) 아름다운 시절에도 기어이 끝은 찾아오고, 대부분의 끝은 어떤 기미도 없이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이후, 한때 친구였던 그 애의 삶은 조각난 이미지로 전해진다. 강남역의 나이트클럽에서 술에 엉망으로 취해 마스카라가 번진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었을 세미, 국산 중형차에 놓인 카시트를 의아하게 보는 지혜에게 "여섯살이야, 이제 주니어용으로 바꿔주어야 하는데 내가 게을러서..."(224쪽)라고 말하며 머쓱해했을 세미. 세미와 지혜 사이, 불현듯 찾아오는 간격을 상상하면 마음이 아프다. 정이현의 이미지들은 세밀한 재현으로 애틋한 정조를 재생시킨다.
자신만은 특별한 사람인줄 알았던 소년소녀는 오래지 않아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삶은 특별하지 않고, 그래서 썩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거라는 걸. "유년 시절엔 누구나 한번은 상상해보았을 것이다. 나의 탄생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위태로운 비밀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정이현, 21쪽)라고 서술했던 소녀가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김애란, 비행운 중 <서른>)라고 중얼거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나날을 세미처럼, 지혜처럼, 준모처럼 곱씹어야 했을지를 상상하면 쓸쓸해진다. 그러나 세미와 지혜가 그랬듯, 다들 살아갈 것이다. 계속. 소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