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출간 이후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 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봄의 제주도’를 기대하고 갔으나 내내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술만 마시다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대부분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책 읽고 글 쓰는 생활의 지속입니다. 쓸데없는 해찰도 하면서.   




이번 작품을 탈고하신 후 기분이 어떠셨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 모르겠습니다. 덤덤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좀 복잡하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을 테지만 그중에서도 꼭 읽어주었으면 하는 독자가 있다면 어떤 분들일까요?


- 어떤 분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내 소설을 읽고 사람들이 ‘삶이 그러함에도 그 속에서 소소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습니다.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멸균’적인 것이 아니고 온갖 균들이, 곰팡이가 창궐하는 곳에서도 아름다움은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작품을 쓰게 된 계기랄까, 그런 일이나 시점이 있었는지, 또 그 후의 집필 준비 과정이 궁금합니다.


- 이 소설은 어쩌면 제가 작가가 되기 훨씬 이전, 거의 3,40년 전부터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많이 슬프거나 억울하거나 답답한 일이 생기면 늘 들었던 생각이 ‘나중에 내가 글로 써버리고 말거야’였지요. 그런 생각이 들면 덜 슬프고 덜 답답하고 덜 억울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집필 준비 과정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살았던 시대가 어떠했는가만 잘 살피고 제 마음만 잘 다스리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글을 쓰다가 지나치게 감정을 쏟아부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이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입니다. 소설 속 정애는 슬플 때나 고통스러울 때 노래를 부릅니다. 그럴 때는 마치 고통받는 현장에서 자신의 영혼을 분리시킨다는 느낌도 받았는데요, 이 작품에서 ‘노래’란 무엇일까요?


- 눈물이겠지요. 우는 대신, 노래 부르는 겁니다. 가슴속에 쌓인 원한, 미움, 증오, 답답함, 슬픔 같은 것들을 노래로 승화시켜버리는 것이 바로 이 땅의 ‘가장 슬픈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오랜 삶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그럼 정말,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요?


- 저는 혹시 누군가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라고 묻는다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도 나오듯이 되묻고 싶어집니다. 정말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요? 각자가 자신에게도 한번씩 물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물음을 묻는 순간, 뭔가 가슴 한켠의 움직임이 느껴질는지도 모릅니다.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어느 부분일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간단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정애가 승천하는 장면. 그리고 의외인지는 모르겠지만, 묘자가 박용재의 거처인 삼아여인숙에서 바깥의 소음과 불빛에 귀와 눈을 모으는 장면이라든가, 용순이 묘자집을 청소하면서 돈을 슬쩍하는 장면 같은 사소한 장면들도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소설에서 “미치지 않은 세상은 언제였을까”라는 구절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책을 덮고 난 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말이기도 했고요. 이 말을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물음이겠지요?


- 나는 모든 사람들이 한군데로 몰려가는 세상이 미친 것 같았습니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가 미쳤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세상이 미쳤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으로부터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은’ 세상이 시작될 듯도 하고 말이지요.  




9정애가 사라지는 장면은 이 작품 전체 중 가장 서정적으로 읽혔습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고요. 바로 이런 대목에서 공선옥 작가의 힘이 느껴집니다. 공선옥 작가의 작품은 늘 해학과 활기, 그리고 희망이 있죠. 아프고 처절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활력이 깃들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저는 정말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남도’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를 키웠던 고장, 그 고장 사람들, 우리 동네 우리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 중 정말 ‘학교 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습니다. 그리고 학교 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먹어본 사람들보다 훨씬 그 말과 행동에 활력이 있었지요. 제가 아마 그런 고장에서, 그런 어른들 밑에서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에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집필하시는 동안 가장 정이 많이 간 인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애일 수도 묘자일 수도 있겠고 혹은 숙자일 것도 같은데, 누구일까요?


- 물론 정애와 묘자입니다. 소설을 쓴 사람으로서 의외의 단역들에게 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소설의 첫 장에서 정애가 뽕 따가는 것을 야단치러 왔다가 고스란히 정애 말을 들어주고 앉아 있던 산 임자도 정이 가는 인물이었지요. 




소설 결말부의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묘자와 또다른 한 여자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여자의 몸에서는 이 세상 모든 냄새가 나고 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는 문장이 이 작품의 주제를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소설의 결말을 쓸 때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 사실은 결말 부분을 미리 다 써놓고 다른 결말들을 계속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애초에 써놓았던 것으로 돌아왔지요. 그렇게 하는 과정 속에서 ‘그런 결말’을 내는 게 가장 순리에 맞는다는 확신이 굳어진 셈입니다. “이 세상 모든 냄새가 나고 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말해주듯, 이 세상의 모든 노래는 실은 이 세상의 모든 ‘진창’을 다 끌어안으면서도 또 그 모든 진창의 세상을 정화시켜주기도 하지요.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쩌면 저 높은 곳,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에 있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는 우리 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것입니다. 




‘세살 정애, 열살 정애, 열다섯살 정애, 서른살 정애’와 같은 표현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시적으로 읽히기도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삶을 살아갈 때도 한 개인의 내부에 여러 나이대가 공존한다고 생각하시는지?


- 저에게는 아이가 셋 있습니다. 지금은 다 컸는데, 한참 클 때 보니, 그 아이들 속에 얼마나 많은 아이와 또 어른이 공존하던지요. 어린아이는 한없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른 또한 한없이 어른이지만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제 속의 아이와 어른을 함께 품고 삽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누구나. 




마지막 질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약자의 삶에 눈을 두는 것은 분명 괴롭고 힘든 일일 텐데요, 앞으로의 작품활동도 이 같은 괘를 이어갈 예정이신지 궁금합니다.


- 제가 어떤 글을 쓸지는 저도 모릅니다. 일반론적으로 얘기하면 작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쓸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문학시장의 침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에 꾸준한 애정을 보여주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사람들이 제 소설을 안 사주면 출판사에서도 저를 찾아주지 않겠지요. 그러면 저는 글쓰기 직업을 포기하고 다른 생계거리를 찾아야겠지요. 아아, 그럼에도 또 저는 이 세상의 삶을 글로 쓰고 싶어 하겠지요.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한권의 소설책이 이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 사람들이 한편의 시도, 한권의 소설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한국문학에 꾸준한 애정을 보여주는 독자’가 있는 한 한국은 그런대로 ‘한국’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 한국이 될 수 없겠지요. 한국문학에 애정을 보여주는 독자가 있어 한국에 한국문학이 있을 수 있고 한국문학이 있는 한은 한국이 한국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만 있고 문학이 없는 나라, 생각하면 쓸쓸한 일입니다. 그런 가공할 쓸쓸한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사람의 독자는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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