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을 오랜만에 발표한 은희경 작가를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발랄한 말투와 반짝이는 표정, 은희경 작가와 나눈 대화를 공개합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우연히, 태연하게
우연으로 완성한 소설이라는 작가 후기를 읽었습니다. 이 소설을 만들게 된 ‘우연’, 소설을 쓰는 동안 은희경 작가에게 벌어졌던 일을 듣고 싶습니다.
다른 소설에도 쓸 때 일어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녹기 마련이에요. <새의 선물>을 쓸 때도 그랬어요. ‘할머니’라는 인물이 처음 제가 구상할 때는 그렇게까지 큰 비중은 아니었어요. 그 소설을 절에 가서 썼거든요. 공양주 할머니 두 분을 매일 대하니까, 그 일상 속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소설 속에서도 비중이 커지더라고요. 작가한테 일어나는 일들이 소설에 영향을 주는 건, 다른 작가에게도 그렇고, 다른 소설에도 그래요.
특히 이 소설이 그런 성격이 강했던 것은, 원래 쓰려고 했던 소설이 안 됐기 때문이에요. “소설이 안 써지는 작가 이야기를 쓰자”는 생각을 했고요, 그 다음 설정부터 우연으로 이어지게 됐어요. 이를테면 사고죠. 사고친 거예요. (웃음)
원주, 연희동, 스페인 말라가, 프랑스 파리, 중국 시안, 미국 뉴욕. 이렇게 여러 도시를 떠돌면서 쓰신 글이라고 들었습니다. 소설속 인물들도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인데요, 떠돎이 소설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그렇겠죠? 그런데, 제가 막 (의도적으로) 다니면서 쓴 건 아니었고요, 소설을 쓰는 일년 동안 우연히 여행이 너무 많았어요. <태연한 인생> 속 이야기는 6일 동안 일어난 일이잖아요. 장소도 신도시 안이고요. 사건만 보면, 볼륨만 보면 그렇지만 그 바깥에 액자처럼 류의 이야기가 있어요. 시간도 류가 태어나기 전, 공간도 다른 나라고요. 그렇게 이 이야기에 볼륨을 준 거죠.
이야기가 이렇게 된 데엔 제가 여행자였던 것도 영향을 주긴 한 것 같아요. 6일간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부모의 인생까지 술술, 이야기가 흘러가게 썼던 게 여행자로서의 그런 감정, 정서적인 기조가 분명히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소설 속에서 재정의된 ‘단어’가 인상적이었어요. 패턴 / 개인 / 고통 / 고독 / 매혹…… 이 단어들 중이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 자신을 가장 ‘매혹’ 시킨 단어가 궁금합니다.
출발할 때 ‘내가 왜 원래 쓰려던 소설을 못쓰는가, 내가 패턴에 갇힌 것 같다.’ 그런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턴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언제나 그랬지만, 소설을 써가면서 인물들이 작가들 끌어가요. 인물들의 삶을 얘기하면서 결국 사랑 얘기가 됐어요.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고독이 따라와요. 사랑이 매혹으로 시작되지만, 매혹의 시기가 지나고 각자 인생에 편입되면서 서사가 시작되고, 서사가 시작되면서 사회 안에 들어가니까, 사회 안의 패턴, 편견, 이데올로기가 매혹을 왜곡시키잖아요. 그런 과정이 좀 나왔어요. 시작은 패턴, 점점 고독과 고통, 나중에는 삶의 매혹…… 그런 단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결국 마지막에는 ‘인간’이겠고요. 제 다른 소설에도 그런데,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인식, 절벽에 도달한 순간 약간 허무한 것, 그 허무가 삶에 스케일을 준다고 생각해요. 허무를 의식하지 않으면 삶은 좀 얄팍한 것이고요, ‘인간은 제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허무 속으로 종결된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삶을 보는 시각에 스케일이 생긴다고 봐요.
소설 안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듯, 이 이야기에선 ‘고독, ‘허무’가 그리 부정적인 의미로 보이진 않습니다.
고독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고독을 부정적으로 보고,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 할 때의 기분, 그때의 감정이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그런 얘기를 했어요. 병도 그렇고, 상처도 그렇고, 고독이나 고통도 우리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읽으며 인상적인 아포리즘(aphorism)을 여럿 발견했습니다. 오래 멈춰두고 읽게 되는, 단언하는, 선언적인 문장들을 어디서 길어오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소설을 쓸 때 저도 이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렸어요. 적어놨던 걸 쓰거나 한 게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요, 주인공들의 상황을 생각할 때 제 마음이 많이 동화되었어요. 가령 ‘고독으로 왔다가 고통으로 자리잡는 거구나.’ 이런 문장은 쓰면서 저도 많이 깨우친 거죠. 결국 사람은 누구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 자체가 고독한 거고, 그게 고통이구나, 저 또한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병이나 고통이나 같이 사는 거라는.. 그런 생각을 했고요. 이야기를 쓰면서 공부가 많이 됐어요. 이 이야기 속 세계에 닿았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글을 읽을 때, 누가 쓴 문장을 보면서도 그런 게 더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실현되는 운명에서 도망치려 해도, 부정적인 것, 피하고 싶은 것들에서 벗어나려 해도, 결국 그런 것들이 나를 더 고통스럽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소설에서 이야기된 문장들도…… 내가 그런 질문속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더 그래서 주목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소설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유난히, 다른 소설하고 조금이라도 다른 게 있었다면, 다른 소설은 ‘이것에 대해 쓰겠어’라는 의도가 있었고, 그걸 만들어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어요. 그렇지만 이 소설은 정말로 정해진 의도가 없었어요. 이 전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에서는 예를 들면 ‘편견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 같은 저 나름의 강한 메시지가 있었어요. 그걸 꼭 말해줘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었고요. 그런데 이 소설은 제가 뭘 전달하겠다는 생각이 없이, 허우적대는 인간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어요. 그래서 소설 쓰는 과정이 더 공부가 많이 된 것 같아요.
S시에서 류가 요셉을 떠나는 장면은 이야기 속 두 인물에겐 ‘필연’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류가 요셉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달라졌을까요?
어쩐지 처음부터 류가 요셉을 떠난 걸로 설정을 했어요. 그게 더 맞을 것 같았어요. 나중에야 이 감정을 어떻게 설득시키나 고민이 많이 됐어요. 두 사람의 헤어짐을 의도를 갖고 설정한 게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먼저 정해놓고, 이해해보려고 했어요. ‘왜 그렇게 절정에서 떠나야 했을까?’
정답은 없겠죠. 결국 두 사람도 류의 부모님처럼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류의 부모처럼 같이 살 수는 있었겠죠. 류의 독백을 처음에 설정할 때는 서로 사랑하지는 않는,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직장동료처럼 살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했어요. (선택받은 입장인) 어머니도 자기 선택에 의해 살아가는 아버지 같은 사람을 선망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했고요. 떠나겠다는 류의 결심도 선택이며. 그 역시 사랑의 실천이라고 나중에는 생각을 했어요. 불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처럼 될까 떠나버린 류의 선택도 결국 고독했지만요. 어머니의 선택, 혹은 류의 선택, 어떤 게 결과적으로 좋았을까. 사랑을 이루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진 않았고요, 서로 다른 둘의 방식이 섞이며 흘러가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소도 카페입니다. 광장도 밀실도 아닌 ‘카페’라는 공간, 공적인 공간이면서도 개인의 공간인 요셉의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희경 작가가 자주 찾는 카페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성격이 좀 산만해서, 집중을 잘 못해요. 차에서 책을 읽는다든지, 잠깐 비는 시간에 어디서 뭘 한다든지 그러질 못해요. 나 혼자만의 공간이 갖춰져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고요. 그래서 카페에 가서 글을 쓴다는 건 원래 생각하지 않았었어요. 카페에 가면 당장 다른 사람 얘기부터 들어오니까요.
소설이 안 풀렸을 때 다른 방식으로 해보면 다른 이야기가 올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소설은 미리 준비를 하고, 적당한 장소에 들어가서, 그 준비된 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으로 썼다면, 이 소설은 나 자신을 기계를 정비하듯…… 나 자신을 준비해두고 뭘 써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였어요. 모르고 어딘가로 가는, 그런 기분이었고, 그 대신 제 감각이 열려있는 것 같았어요. 쓰겠다는 생각이 있는 상태, 모든 감각이 열린 상태로 카페에 가서 저에게 다가온 모든 게 이야기가 되고, 묘사해야 할 장면이 되는 거죠. 그래서 카페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이런 특성들이 저한테 들어온 것 같아요. 지금 현재 내가 있는 시간과 장소를 관찰하는 것에 제 모든 에너지를 썼어요. 제가 쓰고 있는, 만나고 있는, 눈에 띈 풍경...... 이런 것들이 빨려들 듯 소설 속으로 들어갔어요.
은희경, 매혹의 세계
류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극장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 은희경에게 극장이란, 그리고 최근 즐겁게 본 영화가 있다면.
영화를 자주 봐요. 비행기에서도 잠이 안 와서, 뉴욕에서 오는 길에 다섯 편을 봤어요.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지난주에 본 <조지 해리슨>이에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상상마당음악영화제에 출품된 건데요, 멋졌어요. 제가 음악 견문이 넓지 않아서, 좋아하는 것만 들어요. 클래식도 브람스 교향곡 1번만 듣고요. 비틀즈도 계속 들었어요. 비틀즈를 들으면서 쓴 <그것은 꿈이었을까>라는 소설도 있고요.
비틀즈 외엔 ‘폴’의 비틀즈와 ‘존’의 비틀즈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지 해리슨이라는 새로운 아티스트를 조명한 걸 보니까, 이런 선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틀즈는 네 명이잖아요. 조지 해리슨도 예술가로서 창의적인 걸 하고 싶은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만 하니까, 그들이 곡을 만들어놓으면 한 소절마다 기타 반주를 막 넣는 거예요. 그런 갈등 때문에 상처를 받다가 해체한 다음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예술을 하는 과정을 봤어요. 영화를 보면서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라는 걸 표출할 때 가장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예술은 정말 혼자 하는 것이고, 객관적 성취와 관계없는 것이다…… 명상의 세계에 빠진 조지 해리슨이, 그것을 자기의 독창적인 예술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 멋지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예술가와 대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어요.
비틀즈가 처음에는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돈을 ‘막 많이’ 벌고 해체한 다음에, 황량한 대저택을 사가지고 자기가 직접 언덕과 호수를 막 바꿔놓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게 멋져 보였어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도 멋있었고요. 영화 얘기를 더 해도 되나 (웃음) 조지 해리슨이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 그냥 온 집안의 불을 환하게 켜놨어요.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흥행이 되는 그런 영화도 봐요. 좋아해요. 그런데, 그래도, 뭐랄까. 불편한 영화를 봤을 때 더 재미를 느껴요.
카페에서 요셉이 누군가를 관찰하는 신, 그리고 그 관찰이 대부분 틀린 것으로 드러나는 신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의 ‘단면’을 관찰해 ‘서사’를 만들어내는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누군가를 관찰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편이신지요.
저도 사실은 많이 하고 다 틀리거든요 그런데 위축되지 않아요. 왜냐면 작품 속 리얼리티랑 현실 리얼리티는 좀 다른 거예요. 그게 리얼리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상상을 많이 해요. 식당에 갔는데 가족사진이 걸려있더라고요, 멀찌감치 있는…… 젊은 여자랑 아버지 같은 노인이 사진에 있어요. 저는 ‘저긴 며느리고, 저 사람은 시아버지……’ 이렇게 가족관계를 상상했는데 다 틀린 거예요. 딸이었어요. (웃음)
작가의 권능은 현실을 알아맞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포착된 상황을 내가 진짜인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이 작가의 권능이라고 생각을 해요. 예전에는 제가 “저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이런 관계일 거야.” 라고 말했는데 사실이 아니면, 사람들이 “에이 엉터리야” 이랬어요. 그런데 전 틀린 게 더 작가답다고 생각해요. 창조해내는 거지, 현실을 알아맞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틀리는 게……
요셉, 류, 도경, 이안, 이채 등 소설 속 인물이 선명한데요, 이 사람들 중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제일 몰입한 건 ‘류’예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고독이나 고통이나 매혹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 설명하는 인물이기도 해서요.
쓰면서 재미있었던 건 그래도 요셉이죠. 악역을 쓸 때가 재미있어요. 파격적인 걸 대신 해소할 수가 있으니까요. 너무 인품이 뛰어나고 성격이 좋은 인물을 쓸 때는 갑갑해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주인공을 만들어놓으면 극단적인 것도 할 수 있고, 즐거워요. 쓰면서는 요셉 부분이 즐거웠어요.
참 제가 설정한, 첫 일회 분 일부를 쓸 때, 토지문학관을 갔어요. ‘글 안 풀리는 작가’를 써야겠다는 생각 외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토지문학관에 그 당시 영화감독이 유독 많았어요. 그래서 ‘이안’은 영화감독이 됐어요. (웃음)
마지막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노래하기’ 어떤 삶일까요. 이것을 ‘태연한 인생’이라고 봐도 될까요.
글쎄 그렇겠죠. 소설 속 인물들이 다 ‘태연’한 것 같긴 해요. 태연하려고 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요셉 같은 경우는 독설이냐 위악 같은 걸로 하는 거고, 이안 같은 사람은 자기는 아니다, 남과 다르다, 이런 자기기만이 있는 거잖아요. 도경 같은 경우에는 알려고 하지 않잖아요.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고, 불감 상태에서 그냥 떠라 하고, 자기라는 걸 내세우지 않고, 묻어가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죠. 그런 식으로 태연하다는 게 방식이 여러 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고통이나 고독에 주목해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 태연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도 가장 태연하다는 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인물이 류니까요. 류의 삶 자체가 ‘태연’한 거니까, 류에게 ‘태연’하다는 말을 붙이는 게 가장 맞겠죠.
작가 은희경의 태연한 나날
소설 속 소설가 요셉의 이야기처럼, 소설이 쓰이지 않는 때가 있는지, 그런 때면 무엇을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소설이 안 써질 땐 주변 사람들…… 이 제 곁을 떠나는 게 좋겠죠. (웃음) 아무래도 예민해지고 그래요. 토지문학관 작가 집필실 갔을 때, 주말 같은 때는 술자리도 있고 그런데요, 제가 평소엔 유쾌하게 술 먹는 타입인데요, 글이 안 써지면 내내 우울해가지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못마땅하고 이해 안 하려고 하고 그런 까칠함이 있어요. 그런 점이 주인공의 성격을 만든 셈이죠. 굉장히 비관적이 되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제 눈에 안 띄는 게 좋아요. (웃음)
허연, 함성호, 황병승, 서정주 등의 시가 소설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은희경이 읽는 시, 좋아하는 시가 궁금합니다.
다른 소설가들도 그렇고.. 저도 시를 많이 읽어요 가장 정련된 문장이니까 문장학습 기분으로도 읽고요. 소설은 서사를 가지고 말해야 되니까, 보수적인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게 있잖아요. 시는 훨씬 더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위적으로 말하니까 읽어요. 소설 속에서 읽은 시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것이에요. 평소에 ‘언젠가 소설에 한번 써먹어야지’ 생각도 했었고요.
특히 <침향>은… <비밀과 거짓말>에 서정주 시인을 많이 인용했어요. 시 전집 두 권을 굉장히 자주 읽었거든요. 그때 <침향>의 세계를 언젠가 써야 되겠다고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고통과 고독과 매혹과 허무의 세계로 흘려 보내느냐, 침향의 세계로 보낼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소설에도 썼지만, 저는 원래 <가지 않은 길> 같은, 그런 시가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침향>을 봤을 때 이 스케일에 비할 수 없구나…… 역시 이 세계가 깊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서정주 시에서 시공간을 넘는 활달한 상상력 같은 걸 많이 느꼈어요. 이런 게 훨씬 깊은 사유라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작품들, 문장들을 생각하면 ‘우연히 되어진 소설’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결국 오래 생각했던 문장, 오래 생각했던 이야기가 표현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걸 느낄 때 영감이 왔다고 하는 거예요. 뭘 쓰려고 앉아있을 때, 모든 게 굉장히 열려있어요. 포착이 되는 예민한 상태에서, 내 안에 있는 걸 여는 거죠. 전혀 몰랐던 걸, 새로 알게 되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있었던 나와주면 그게 영감이라고 생각해요. 번개같이 떠오르는 게 영감이 아니라요. 내가 느끼고 알고, 갖고 있었던 것들이 마침 딱 적당하게 떠오르는 것이 저는 영감이 오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종종 그런 때가 있었어요. 이 부분을 쓰면서 ‘아 그 시가 있었지……’ 생각이 드는. 그런 감각이 있어서 가까스로 소설을 완성했죠. (웃음)
이안의 영화에 등장할 술자리 장면을 보며, 또 소설의 마지막을 읽으며 어쩐지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소설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말 ‘술자리 같은’ 술자리였다고 할까요.
작가들이 어떤 장면의 디테일을 상상할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상상이 안 돼요. 제 경우엔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어야 상상이 되거든요. 미용사는 쓸 수 있어요. 본 적이 있으니까요. 조경사라든지 전혀 모르는 경우는 공부를 해야 되겠죠. 상상을 해도 상상의 기초적인, 단서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술자리는 제가 익히 잘 아는 장소니까, (웃음) 사실은 모든 장면을 구체적으로 머리에 동선을 그려요. 이 소설에 나온 것들, 수필 심사라든지 대단찮은 영화제, 이런 것들도 그 기간에 저한테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었던 거거든요.
제가 상상한 술자리는요. 제가 홍상수 감독이 <첩첩산중, 2009>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출연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영화 찍는 장면을 봤어요. 나중에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니까, 내가 모르는 것을 봐둬요. 정유미씨, 이선균씨가 술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쓴 거예요. 그 영화의 동선으로 소설 속 술집의 동선을 쓴 거죠. 그래서 영화를 봐두는 것도 좋아요. 할리우드 영화, 블록버스터 무비도 취재는 안 되지만, 동시대인으로서 감수성에서 뒤지면 안 되니까, 또 제가 재미있어서 보지만, 또 다른 쪽 영화는 제가 취재 삼아 보는 게 있어요. 감독만의 독특한 시각, 정서의 포착, 그런 게 필요할 때 이전에 봐둔 게 적당히 나와주기를 바라고 경험해놓는 거죠. 영화와 관련되어 제가 구경해놓은 것들이 도움이 됐어요. 현실성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제가 거기서 마음속에서 취재를 해놨기 때문일 거예요.
영화 찍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가서 본다, 그러면 취재가 돼요. 그때는 내가 이미 어떤 의도를 갖고 보기 때문에, 일반적인 눈으로 보게 돼요. ‘술집 장면을 써야지’ 생각을 보면 내가 원래 갖고 있던 상투적인 틀만 나올 거예요. ‘무조건 구경해놔야지’ 생각하고 보면 다른 걸 볼 수 있어요.
은희경 작가가 최근에 보고 있는 책이 궁금합니다.
요즘은 바르가스 요사 책을 보고 있어요. 대가들이 나이 들어서 쓴 소설들을 최근에 좀 찾아서 읽어보고 있어요. 젊어서 쓴 소설에 비하면 나이 들어 쓴 소설은 느슨하면서 간명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전성기가 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있잖아요. 그런 작품에 비해서 조금 더 대중적이에요. 그것들을 재미있게 봐요. 마르케스 것도 그렇고 요사도 그렇고요.
작가 소개가 독특합니다. “유럽 도시의 카페와 로키산맥 캠핑장 모두 좋아한다. 개콘과 소지섭과 못 밴드와 키비를 좋아하고, 예쁜 사람들을 편애한다.”와 같은 문장으로 은희경을 설명하고 있어요. 작가 은희경이 요즘 좋아하는 것들이 궁금합니다.
그때랑 달라졌나…… 산문집(<생각의 일요일들>) 낼 때 제가 쓴 거거든요. 그게 일년전이에요. 그 사이에 뭘 좋아하게 됐을까…… 여전히 뭐…… 그때 이후로 달라지게 된 것은 크게 없는 것 같아요. 태연한 인생이 하나 더 생겨서,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된 정도? 농담인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이상할 것 같아요.
이 소설을 내면서 뭔가 해소를 한 거 같아요. 그 동안 혼란에 빠져있었고, 그러면서 화도 나고 했어요. 실컷 욕할 일 실컷 욕했다는 기분도 있고요. 그래서 이제, 다른 소설이 쓰고 싶어졌어요.
그렇다면 은희경 작가가 쓰게 될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쓰려고 했는데 못 쓴 얘기를 다시 쓰겠죠. 그 얘기는 장편이고요. 장편과 단편은 쓰는 기분이 달라서 단편은 귀여운 기분으로 써요. 장편을 연이어 썼으니까 단편을 당분간 쓰려고 하고요, 그 다음 장편은 제가 쓰려고 했으나 쓰지 못했던 소설을 쓰고 싶어요. 이제 나도 패턴이라는 거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으니까, 이제 써지겠죠? (웃음) 다시 그곳으로 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