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평창동의 조용한 미술관에서 신경숙 작가를 만났습니다. 작가님은 직접 구운 고구마를 살갑게 건네주시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향인 '정읍'에도 며칠 다녀오셨고, 눈이 오면 옆집 눈도 쓸어주고, 그리고 소설도 읽고 쓰고 하며 지낸다고 하시는 신경숙 작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터뷰 진행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신경숙의 2011년, 국경 너머에서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작가님께서 한국을 비운 새 2008년작 <엄마를 부탁해>가 다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는 등,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체류 중, 신발을 몇 켤레나 준비하셨는지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을 듣고 싶습니다.

 

콜롬비아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가면서 짐을 일년 예정으로 쌌어요. 여름이라서 여름 신발밖에 안 사서, 신발은 거의 거기서 사서 신었죠. 여러 켤레 사서 신고 그랬네. 맨하탄서 있었는데요, 길이차가 있으면 또 불편한 도시가 맨하탄이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계획도 차 없이 살자, 했고, 아파트도 맨하탄에 얻어서 걸어다녔어요. 그렇다보니 신발이 정말 많이 필요했지. 밖에 나가면 걸어 다녔어요. 블록이 넓지 않고, 지도가 잘 되어 있고, 찾아가기 좋은 도시였어요. 맨하탄 사람들은 뉴욕에서 자연스럽게 지하철 타거나 걸어다닌대요. 그런데 지하철이 오래되고 덥고 그래서, 좀 우리 한국 지하철 같지가 않아요. 놀랄만한 풍경들도 많고, 그래서 지하철을 안 타려면 걸을 수밖에 없는 거죠. 걸으면서 지냈어요.

 

그리고 거기 간 이유는, 일년 동안 좀 안식년 같은 휴식기를 주고 싶었어요. 뉴욕이라는 데가 새로운 문화들이 아주 빠른 시간에 순환되는 곳이고 탄생되는 곳이라 거길 택했었고, 몇 개월 동안 익명의 존재로 아주 편안하게 지냈죠. 매일매일 무슨 일이 일어나니까, 미술관이나 공연들이 많아요. 링컨 센터에 연계되어 있는 많은 공연장들에서, 프로그램을 잘 찾아보면 뮤지컬이라든지 산보 나가서 볼 수 있는 재즈 공연이나 음악회나 댄스 같은 게 많아요. 무료로 하는 데도 굉장히 많고요.

 

 

백수 한량처럼 몇 개월 지내고 아이고 이거 참 좋구나. 하다가 인제 이 나온 이후 깨졌지. 스케줄이 있이 간 게 아니고, 거의 없이 갔었어요. 책때매 간 게 아니었는데, 공교롭게 그 책이 나오는 거하고, 일정이 맞았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현장에 있어서 책 만드는 현장을 또 보게 되었고, 책이 출판되어서 서점에 깔리는 것도 보게 되었죠. 투어 프로그램이 짜여서 미국과 유럽 쪽에 동시에 책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도 한 열 개 도시쯤 투어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고 낭독회도 하고, 사인회도 하고. 그랬었고요. 유럽쪽은 두 달 동안 짧으면 3, 길면 5박 그런 스케줄로 이동을 하면서 스페인, 노르웨이,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이스라엘, 영 그런 나라들, 한 열 나라들을 다녔어요. 책 인터뷰도 하고, 서점에 가서 사인회도 했고요. 바로 책이 나온 데에선 사인만 하기도 했었고요, 현지 출판사서 마련해놓은 작가들과 함께 낭독회한 적도 있었고요, 스페인인에서는 30분 간격으로 인터뷰만 했고요. 굉장히내 인생에서가장 번다한 이동과, 아주 수많은 인터뷰를 하며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그래도 각 나라에 갔을 때마다 서점 가는 재미도 있고, 그랬어요. 한국 책이 처음 나오는 나라도 있었으니까요. 그 서점에 꽂혀있는 걸 보면 즐겁기도 했었고.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일년이 그렇게 짧게 지나갔어요. 그리고 돌아왔죠. 지금은.

 

 

영어로 책이 나오고 난 다음에 해외 판권이 더 많이 계약이 됐다고 해요. 처음엔 열여덟 나라였는데, 영어 책이 나오고, 책에 대한 반응도 좋았었고 해서 계약된 나라가 32개국이 되었지. 열여섯 나라에선 나왔고, 계속 나오고 있어요. 내년에도 미국에선 하드커버 말고 페이퍼북으로 다시 나올 거고요. 알라딘에 연재했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도 크노프 에디터랑 서로 메일 주고받으며 얘기하고 있는 중이에요.

 

귀국은 팔월 말에 했는데, 일본에도 책이 나와서 구월과 시월에 일본에 두 번 왔다갔다 했었고요, 호주에도 그 사이 다녀오고 했어요. 그 후엔 <모르는 여인들> 교정지 붙잡고, 내 책상에 돌아와서 앉았죠. 그냥 한 해의 시간을 <엄마를 부탁해>와 함께 보낸 것 같아요. 2008년에 나왔으니 4년째죠. 이 책은 새로운 시작이랄까, 다른 작품으로 가는 징검다리랄까. 그 시간들에 <모르는 여인들>이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묶어주지 않아서 수록 작품들 사이 시간이 길어요. 그래서 약간 긴장했었죠. 그 시간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좀 낡은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해 내 검열은 통과했어요.

 

 

 

 

 

 

 

 

 

 

 

 

 

 

 

 

 

 

 

2004년 작품인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주인공의 직업으로 MD가 나와서, 인터넷 서점 MD로서 신기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때가 사실 MD가 뭐야 이럴 때예요. (웃음) 현대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신의 직업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지금은 보편화가 된 인터넷 신문 같은 것들이 안정화가 될 수 있을지 어쩔지 실험단계에 있는 상태였거든요. 대기업에 자기 할 일이 있고, 안정적 직업을 가지고 있던 한 남자가.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싶었던 거라서요.

<아름다운 그늘>이라든지 <외딴 방>이라든지, <풍금이 있던 자리>라든지. 그런 작품들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기쁘게 생각하는 건, 대부분 책이 나온 지 15, 20년 가까이 되는데도, 그렇게 시간을 잘 견디고 뚫고 나와서 아직도 지금젊은 독자들하고 옆에 같이 있다는 거예요. 너무 감사하고 기뻐요.

작품에도 나이가 있다면, 나이가 든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게 이제 낡은 거죠. 그런 걱정을 좀 했는데, <모르는 여인들>은 다행히 그걸 잘 통과해준 것 같아요.

 

 

 

 

 

 

 

 

 

 

 

 

 

 

 

 

 

 

 

 

물론 이전에도 만나셨지만, 작년, 올해 세계의 많은 독자를 더욱 많이 만나셨을 텐데요, 미국이나 유럽 독자들은 만나면 어떠신지요? 우리 나라 독자와 차이가 있을지요?

 

받아들이는 게 좀 다양했어요.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우리나라 독자들이나 비평가들은 그 세계가 익숙하니까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게 있는데요, 국경너머 독자들이나 리뷰를 쓰는 분들은 뭐랄까새로운 거예요 이게. 문화 자체가 새롭고,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지고 해서 오히려 작품이 풍성하게 읽히는.. 경우가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딱히 엄마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세대간 문제로, 전통과 현대의 거리를 메우려고 하는 작품으로 읽는 경우도 있었어요. 엄마보다도 오히려, 엄마라는 상징을 잃어버린 가족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었고요.

 

또 우리가 대부분 태어난 데서 살지 못하잖아요. 대부분 교육이나 직장 문제로 대도시로 나가거나 국경 너머로 나아가거나 하고, 그게 우리 인류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러다 보니 유목민 상태, 인데요. 이 작품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모두 다 대도시로 나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있었어요. 태생지를 떠나, 대도시나 국경 너머로 나가서 이동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엄마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작품에 느끼는 반응이 더욱 각별했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인가 하는 도시를 갔는데, 미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책을 열일곱 권인지 열아홉 권인지를 쌓아가지고 사인을 받으러 왔어요. 그 분하고 얘기를 조금 하게 됐는데, 할머니가 먼저 작품을 읽다가 여기 당신이랑 똑같은 사람이 있다.” 그랬대요. 왜 아버지가 엄마보다 항상 빨리 걷잖아요. 그 할머니께서 거기서부터 너무 잘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할아버지가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는데, 북클럽 회원들한테도 읽게 하고 싶어서 아홉 시간을 운전해서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비슷하게 걷나요?” 물으니 노력을 할 뿐이라고.” 하시던데, 그런 사람들도 있었고요.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우리랑 거의 똑같은 느낌이에요. 소설에 나오는 박소녀 엄마와 이스라엘 엄마가 비슷해요. 음식이라든지 집의 환경도 비슷하고요. 물론 문화적인 차이는 있죠.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똑같은 걸 발견하려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서 나와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에 대해 이건 너무 한국적이고, 한국 문화가 스며들 듯이 문장에 있는데, 외국독자들이 이해를 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도 세계문학을 번역해서 읽고, 또 그 문학 속 세계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 다른 점들에 매혹되어 읽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아마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번역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여행이기도 하잖아요. 나는 한국어로 썼지만 다른 나라말로 번역이 되어서 그 나라 말을 쓰는 사람 사이를 여행한다고 생각해요. 이번엔 묘하게, 작품뿐만 아니라 나도 작품과 여행을 같이 했네요. 엉켜있어요. 경험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요. 시간이 좀 지나면어떤 식으로든지 정리되고작품으로도 나오는 장면이 있을 테죠작가가 머문 공간이나 실어내는 시간이나이런 것들이 특별하게 숨기고자 하지 않는 이상 곧 작품의 무대가 되고 그러니까요.

( : 신경숙 작가는 이국의 독자들과, ‘엉켜있는시간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쉬었습니다. 그 침묵마다 그가 경험한 풍경이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단편쓰기, 사진찍기

 

책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반짝이는 이미지와 보일 듯 말 듯 선 여인, 그리고 초록과 푸른 정조이 책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표지를 출판사에서 만들어가지고 왔을 때였어요. 그때 나는 마음 속으로 표제를 <모르는 여인들>로 할까, <세상 끝의 신발> 이렇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어요. 표지를 본순 간 <모르는 여인들>로 표제를 정하게 됐죠. 제 표지를 많이 해주신 송윤형씨가 너무 예쁘게 잘 해줬어요. 이 책 속 일곱 편의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간 속에서 각자에게 은연중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 이야기 흐름을 상징하는 역할도 제대로 하는 것 같고 했어요. 뒷모습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아트책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이 여인의 모습도 균형이 묘해요. 탁자에 팔을 대고 있고. 발도 아주 약간 어긋나게 하면서 짚고 있잖아요. 상징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이 책에 내가 사인해서 세워놓잖아요. 그럼 정지되어 있는 게 아니고 어딘가로 막 이동하고 있는,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요.

 

 

 

8년 만에 출간된 소설집입니다. 2003년 소설에서 2009년 소설까지, 총 일곱 편이 모여있습니다. 단편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과작(寡作)인데요, 이렇게 간간히 단편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이유가 있을까요? 더불어 단편쓰기와 장편 쓰기의 차이점에 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단편들 사이에 장편이 있어요. <리진>, <엄마(를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나는 단편을 쓸 때는 단편만 쓰고, 장편을 쓸 때는 장편만 쓰고 이렇게 밖에 못해요. 성향이 그래요. 특히 장편 쓸 때는, 장편 쓰는 시간이 길잖아요. 그 기간 동안 거의 거기에 몰두해서 단편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두 가지 일을 한번에 못해요.

 

그러다 보니 이 작품들은 어떤 장편이 시작되기 전, 혹은 끝나고 난 후에 주로 쓰여졌어요. 작업 안 하고 생각만 하고 있을 때요. 개인적으로도 나를 유지시켜주고 있는 관계가 깨져서, 너무나 균형을 잃고 헤맬 때라든지. 또 사회적으로도 매일매일 뉴스 지면을 장식하는 너무나 큰 사건에, 머리를 둔중한 걸로, 날카로운 걸로 얻어맞은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될 때그럴 때 나 스스로 이 작품들을 쓰면서 다른 시간으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두워진 후에>라는 작품을 쓸 때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그 여자를 이 세상에 탄생시키고 싶었어요. 너무나 어두운, 한쪽은 이미 어두워져 있는 세상의 다른 한편에 그 매표원 여자를 세워두고 싶었어요. “네 그러세요.” , “네 그래요.” 라고 말해주는 여자를 탄생시켜서 세상 속에 섞어놓음으로써 제가 인간에게 가지고 있던그런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자발적으로 쓴 작품이 많아요 단편은 특히요. 모든 작품이 다 자발적이지만, 소설집 속 단편은 암묵적으로라도 이런 작품을 쓰겠다.’하는 약속 없이, 청탁이나 이런 거 없이 썼어요. 완성되면 이런 작품이 쓰여졌는데 실어줄 수 있겠냐.’고 말을 하거나, 혹은 청탁이 와서 쓰여진 작품을 주거나 그랬었죠.

 

단편을 쓸 때는, 유장하게 흘러가는 시간 중 한 순간에 집중이 돼요. 사진 찍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진 렌즈에 맞출 때 빛과 표정과 시간과 이걸 다 한 렌즈 안에 담아서 이미지를 만들어내잖아요. 단편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반짝하는 그 순간 같은. 그러나 장편은, 그 반짝하는 그 순간이 확장되죠. 굉장히 넓고, 뭐라 그럴까단편으로 볼 수 없는, 하나의, 더 큰 세계가 담겨있는 것 같아요. 빤한 이야기지만.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 다르고요.

그러나 나로선 쓰는 마음이 다른 건 아니에요. 다만 시작한 이후 완성하는 시간이, 장편은 너무 길잖아요. 그래서 옆에 항상 살고 있는 것 같애. 장편 속에 있는 화자들이. 신경숙이 먹는 게 아니라, (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이라면 윤이가 어떻게 먹었을까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요. 장편 쓸 때는 소설 속의 인간들하고 함께 숨쉬고, 살아가고 하느라 오히려 소설 바깥의 관계들하고 단절되는 경우가 많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아요. 그 리듬이 깨져서요. 리듬을 한번 깨면 회복하기도 너무 힘들고 해서. 그런 차이가 있죠.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당시엔 매일 새벽 같은 시간에 소설을 쓰는 습관을 유지하셨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단편소설을 쓰는 풍경에 대해 묘사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땐 그랬죠. <엄마를 부탁해>때문에 너무 바깥일도 많고 휘둘리고 했을 때라서, 그 중심을 잡아주는 게 나한테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을 연재하는 시간이었어요. ‘어쨌든 새벽 세시에서 아홉 시까지 작품에 집중하자.’해서 그 시간에 일부러 빼놨죠. 대부분 그 시간에 해요. 내가 일상이 번다하지 않기 때문에 작품 쓰게 되면, 사실은 대부분 작품 쓰는 것에 시간을 보내죠. 배고프면 먹고, 쓰고, 졸리면 또 자고, 또 쓰고이런 스타일을 꽤 오래 유지해왔는데. 40대 지나고 하면서, 다른 일들이 많이 생기고 그래서 그렇게만 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어쨌든 시간을 좀 더철저하게 운영해서 써야 하는 상태에 놓였어요.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일이 없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오전시간까지 작업하고그래요. 그 시간에 집중이 가장 잘 되기도 해요. 어두웠을 때 깨나서 밝아지는 그런 느낌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마음 <모르는 여인들>

 

 

표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모르는 여인들>에서 처음으로 영상을 통해 소설을 낭독하는 작가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지태, 정인기 등의 배우의 목소리로 읽히는 이야기와, 작가님의 목소리로 나직하게 읽히는 소설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낭독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작품을 쓸 때 가장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사실은 소리 내어 읽어보는 일이에요. 내 작업실에서. 낭독을 해보면 언어가 이렇게 좀그 문장에 맞지 않고 겉도는, 걸리는 게 눈으로 볼 때보다 확실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가장 적절한... 언어를 찾을 때 읽어보면서, 걸리는 걸 수정하고 하는데요. 물론 그걸 낭독이라고 할 순 없지만요. 그래서인지 이번에 그영상을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특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한 구절 낭독을 했고, 또 전체적으로 다 같이 낭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그 부분 낭독을 할 때는 조금 독자가 된 느낌이었어요. 작가의 말 낭독할 때는 내 말을 내가 써놓고 내가 낭독하니 조금 이상하구나, 이걸 그대로 책을 보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고요. 즐거웠어요. 출판사 옥상에서 했던 것 같은데, 야외에서, 새도 지나가고 하는 곳에서 함께, 뒤섞이는 기분도 들었고요. 낭독시간 좋아해서 즐거웠어요.

 

대화대사?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는 대사들을 뽑아서, 대사만 듣고도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알 수 있는 문장을 택한 것 같은데요, 대부분 그 <모르는 여인들>에 나오는 그 남자 , 나의 화자의 이십 년 전 남자친구가 겪는 상황에 대해서, 자기에게 닥친 상황이 너무 부당하다는 느낌을 같이 받나봐요. ‘이게 왜, 내 인생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하는. 부당한 느낌을 가지고 낭독을 하니까,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유지태씨는 낭독을 모노드라마처럼 잘하던데요? 아 역시 배우던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표제작의 나직함이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더 이상 떨리지 않기에 불행하지 않다는 여인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안정한 시기, 떨리는 시기를 겪고 있는 젊음에게, 선생님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소설에는 이십 대라는 시간이, 젊음의 시간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있진 않지만, 그래요. 이십대는아름답고, 열정적이고, 정직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불안한 시절이 아닐까 해요. 그 시절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절인지, 자기 감정들이 백프로도 넘게 투영되는 시간이 얼마나 빛나는 시절인지 당시에는 몰라요. 당시에는 알고 있어도 약간 곤란할 거 같아요. 내 생각엔. 발등 앞에 떨어진 그 불안과 고독을, 정해지지 않은, 불투명한 앞날 때문에 잠 못 자는 날도 많고 방황하는 시간도 길고 그렇잖아요. 그런데항상 그 시간이 계속되지는 않아요. 차라리 그게 계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모르는 여인들>에 나오는 이십 대의 어느 순간은, 아주 빛나는 시절이지만, 그런 나에게는 벅찬,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고. 그 순간을 내가 지탱하기 어려워서 나와,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들을, 타인들을 저버리게 되잖아요. 그런데훗날…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또 다시 나를 만나게 하고나는 본적도 없는, 내가 저버린 그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 그리고 그 아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주고받는 노트를 읽게 되죠. 또 그걸 읽으면서... 사십 대가 되었어도 불안한 나의 일상을 어느 순간 사랑이 감싸주게 되잖아요. 참 미묘한 관계들인 거죠.

뭔가를 저버리게 되는 순간에도,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에도, 그런 순간들은 우리가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땐 정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죠. 물론 ?”라는 질문은 항상 남아있지만요.

 

내가 언젠가도 한 얘기 같은데, 시간은 직선으로 반듯하게 흘러가진 않아요. 뒤섞여있는 거예요. 원처럼. 십대의 어떤 날들이 사십 대의 어느 날에 불쑥 찾아와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런 역할도 하는 거고요. 이십 대의 어떤 날들이 지금, 사십 대의 시간을 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거고요. 그래서 그게 십 대든 이십 대든 삼십 대든, 내가 어떤 순간을 만나든 그 순간을 최상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언젠가는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겠죠. 오랜 시간 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아픔이든, 상처든, 혹은 기쁨이든 하는 감정들과요. 그러나 그 이십 대의 불안한 상태, 아픈 상태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요. 언젠가는 그게 누그러지기도 하고, 오히려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옮겨가기도 해요. 마음이요. 언젠가, 그 순간을 보며 내 앞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데, 그런 거를 알게 되는 때가 이십 대는 아니에요. 그렇다 보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서 마음을 기울인 뭔가가 어긋났을 때 거기에 매몰되어 다른 시간을 향해 나가지 못하는 상황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렇기도 하죠.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 지금 이 순간은 20년 후, 30년 후, 또 다른 어떤 순간하고 묘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때까지 가봐요. 가보는 것이 우리의 기본기본적인 약속인 것 같아요. 이렇게... 약간 빛이 바랜 듯이 여겨지는, 그렇지만 거기서 반짝반짝 거리고 있는, 그런 순간순간들이 많이 쌓여있는 삶을. 그런 삶은하루하루살아내야 쌓이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40대쯤, 이 모르는 여인들에 나오는 그런 시간들을 마주치게 되면, 완전해서 평화로운 게 아니라, 그런 불완전한 것들에 대한 이해랄까, 혹은 불완전한 것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여유라는 게 찾아온다고.. 찾아오기도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실지로 그런 것 같아요.

 

이십 대일 땐 서른이 되는 게 너무 막막했고, 서른쯤 되니까 마흔이 지나면 무슨 생각으로 살까, 무슨 즐거움으로 살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실은 삼십 대나 사십 대나 인생으로 보면 사춘기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언제나 아까 말했던 순간순간들, 시간에 다다르면서, 어떤 상태를 겪겠지만, 그 상태 자체가 다가 아니에요. 같이 있는 거야. 과거도 같이 있고, 여기서 나갈 때는 저기 앞날도. 다 섞여있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아주 성의있게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시간에 비추어서 순간이 찾아오겠죠. 내면이 진심으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라든지, 평화라든지 그런 순간이요. 오는 거는 와요. 완성된 상태로 오진 않겠지만,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인 것 같아요.

 

 

 

 

 

순간순간 발견해내는 선의의 빛

 

소설 속 일상의 풍경이 무척 구체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 내린 시골집 풍경, 이들이 먹는 소박한 음식, 명동 롯데백화점, 독일의 거리 등. 이러한 삶의 풍경은 평소 경험하며 얻으시는 것인지요? 생활에서 소설까지, 구체적인 발상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지가 어언 30년이 넘어서게 됐어요. .... 놀라운 세월이잖아요. 어느 공간에서, 도시에서 30몇 년을 살게 되면 자기 식의 지도가 생겨요. 광화문을 바꿔놓고, 버스노선을 바꾸는 통에 최근에는 다 깨졌는데, 그래도 내가 걸어 다니는 골목이나 땅이나 도시의 풍경들이, 내 마음속에 쌓여있죠. 대학 때 특히 많이 다녔던 길은 명동성당, 롯데백화점, 남산 이런 곳이었어요. 시간이 지나서 나는 그 길에서 사라졌지만, 젊은 나는 언제나 거기서 걷고 있죠.

 

지금도나는 개인개인들이 살아내는 일생이, ‘한낱이라는 말이 필요없는 신화라고 생각해요. 개인이 치루어 낸 십대 이십 대 삼십 대.… 오십 대 육십 대…. 이런 시간 속에 장소도 다 다르게 각인되어 있겠죠. 그러니까 작품 속에 각인된 장소들은 내 마음 속에 각인된 세상일 거고요. 열다섯 살에 서울에 첫 발을 디뎌서, 이사도 무지하게 많이 다녔어요. 열일곱 번인가 다닌 거 같애요. 그렇게 다니는 동안 갖게 된 골목에 대한 이미지라든지... 그런 게 쌓여있죠. 그게 구체적으로 지명되고, 지시되지는 않는다고 해도요. 서울을 떠나서 다른 도시에 살면서 거기를 여행하다 문득 깨달은 건데요. 국경 너머 다른 도시에 가면 가능하면 최대한 그 도시를 구석구석 알아보려고 살펴보고 찾아가고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어느덧 서울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나더라고요. 내가 서울에 대해서 그런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애써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난 거의 강남은 몰라요. 강북서 살았기 때문에, 외국보다 더 낯선 도시예요. 그래서 돌아가면 서울 구석구석을 여행하든지, 잘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디터(: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을 발행한 크노프 출판사의 에디터)가 서울에 왔을 때 일주일 동안 나도 서울을 다시 보는 마음으로 돌아다녀본 적도 있었어요.

 

물론 장소들은 작품 속에서 똑같이 등장하진 않아요. 그러나 장소들은, 특히 공간이 어느 소설 속에 등장할 때는 그 작가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화분이 쌓여있는 마당’(: 소설 <화분이 있는 마당>)이나그 마당이 있는 집에 내가 아주 자주 드나들던 어떤 시절도 있었고, 그 시절도 데리고 온 풍경이 있었어요.

 

물론 그때, 내가 그 집을 드나들 때의 상태 그대로 나오는 건 아니에요. <화분이 있는 마당>. 아주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느닷없이, “너하고는 앞날을 꿈꿀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그만 만나자그런 편지를 받는 걸로 이야기가 되잖아요. 그건 단순한 편지가 아니죠. 자기 세상을 파괴해버리는 편지인 거죠. 그렇게 단절되어가는 순간을 어떻게 견뎌나갔는지를 추적하는 걸로 그 작품이 쓰여졌고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한테 음식을 대접받고, 이야기를 이쪽 사람이 아닌 저쪽 사람한테 하게 되면서 잃어버린 말을 찾고, 치유 받는 그런 소설이 된 거죠. 그러나 공간은, 그런 작품 속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살았던 어느 시간 속에서 내가 봤던 느낌들이겠죠. 작가가 경험한 공간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작품에서도 시골과 도시가 같이 나오는데, 언제부턴가 도시 자체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어요. 일부러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이 도시 속에 스며들고 익숙해진 것 같아요.

 

 

 

일상에 가까운 이야기라, 이들의 불안과 떨림, 슬픔과 좌절이 더욱 크게 와닿았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만나는 나쁨은 거대한 악이라기보다는 소소한 부조리에 더 가까운데요,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더 상처받아야 하는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부조리들이 더욱 사무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일상 속, 불현듯 찾아오는 불행과 고독의 풍경에 특히 주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리는 보통 상처라고 간단하게 표현하는데, 사실은 많은 것들이 그렇게이루어져 있어요.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그런 결과를 얻게 된 거라면 내 책임이고 감당해야 되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사실 인생은 도대체 수긍할 수가 없는, 어떻게 이렇게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지? 이런 일로 훨씬 더 많이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작품을 쓰면서는 수긍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관, 절망 분노, 저항감, 이런 것으로부터 시작을 한다고 해도, 내가 문학작품에 대해선 끝없는 것들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작품을 쓰고 나면 오히려, 분노보다 더 먼 것을 가리켜요. 분노에 함몰되지 않아요. 더 먼 시간을 볼 수 있는, 어떤 것을 문장 안에서, 찾아내게 되고 발견하게 돼요. 우리가 어떤 길을 간다면, 가는 동안에 보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날카로운 것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치워놓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우리가 모두가 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 예기치 않은, 너무나 예상하지 않았던,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해볼 때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는지, 그런 질문에 까지도 계속 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분인 것 같아요.

 

단순한 상처라는 말로 해결되지 않는 더 깊은 게 있어요. 그것또한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인 거예요. 그렇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것들과 함께, 가는 거죠. 대신에 앞으로나아가는 거죠.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에요. 느닷없이 이유도 자기는 모른 채 가족을 모두 연쇄살인마에게 잃어버린( : <어두워진 후에>)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요. 그래서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폐가에 가서 살던 남자가 너무나도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한 여자. 그 여자의 모습에서 다시 살아볼까, 도시로 돌아오면 새 신발을 사 신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역할도 역시 사람이 한다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게 상처도 주지만, 다시 돌아가 볼까. 다시 시작해 볼까. 그런 희망도.. 역시 사람이 준다는 거죠.

 

일상은 정말 중요해요 우리한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걸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그 여자를 통해서 보는 거잖아요. (어두워진 후에 中) 여자 쪽도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잖아요. 남자에게 결핍된 부분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어머니가 너무나 가지고 싶어했던 우물도, 여자의 집에는 자연스럽게 있고 한 것처럼요. 그런 것들 것 보게 해주는 것이내 작품의 한 역할이라고, 역할이었으면 했나 봐요. 균형이 이렇게 맞추어지길 바랐고요. 어차피 소설이라는 거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발견해내주는 게 아닐까, 했어요. 삶에 대한 질문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고요. 새로운, 아주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온 시간 속에서, 잊어버리고 지나가고 무시해버린 것들 속에서 발견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작품들에 여기저기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봐요. 수면 위로 떠올라있는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라 익명의 존재들. 내가 그 존재와 관계를 맺고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강인함, 아름다움, 슬픔. 그 존재들을 통해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발견해나가는 관계로 얽혀있는 게

 

 

 

말하기보다는 듣는, 고요한 인물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을 잃은 인터뷰어(<화분이 있는 마당>), 잡지사 에디터이자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는 여성(<세상 끝의 신발>), 시어머니의 말을 들어주는 아내 (<그가 지금 풀숲에서>), 10년의 외로움을 나누는 친구(<성문 앞 보리수>) 등의 인물들,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무던히 들어주는 존재들을 보며 소통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인물들이 이야기를 들어주듯, 소설 역시 독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그리고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많이 등장하죠. 현실에서 결핍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소설 속에 많이 들어가 있을 거예요. 누구 이야기를 좀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어떤 한 존재가 참혹한 상태에 처해도, 자기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어주는 다른 한 존재만 있어도, 한 사람만 있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그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들어주는 것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어요. 소통이라는 것도 사실, 내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되잖아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래야 되는 거고요. 들어야 하는 시절에 우리가 놓여있는 것 같아요. 소설 자체도, 사실은 쓰지만, 듣는 게 아니고 쓰는 거지만, 나랑 연결되어 있는 이 시간을 함께 통과해나가고 있는, 특히 나랑 같은 시대에 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라고 생각해요. 내가 들은 이야기가 문장으로 탄생되는 경우도 많을 거고요,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더라도 내 작품 속에 등장해서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들은 나랑 같이 살면서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준 사람들이 아닐까요.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느낌으로라든지, 삶을 사는 그 자체의 모습으로든지내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들려 준그런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글쓰기도 계속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독자랑 작가랑도 어떻게 보면 그런 사이겠죠. 듣고 들어주는 관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각박하고 엄혹한 세상을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서로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놀랍습니다. 연쇄살인마의 팬클럽이 생기는 현실이 놀랍지 않은 나날이라, 도요타 자동차 수리비를 받지 않는 주인의 이야기가 더욱 놀라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 작가님께서 해주신, 이웃의 눈까지 모두 치우신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치우지 않고 그냥 둘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연결된 존재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작은 배려, 소설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작은 배려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하나씩, 그런 것들이, 내가 한 순간순간의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영향을 준다니까.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걸 간직하게 하고요. 내가 계속 치우면, 우리 옆집은 자기도 언젠가 치우진 않을까, 해요. 내가 집을 오래 비웠는데, 누가 치우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유지되잖아요. 아마 옆집서도 치우지 않았을까. 그렇죠. 같은 길을 가는데 기와나 이상한 게 있으면 치워주고 그러면 돼요. 이런 건 시간도 안 걸리는 일인데.

 

어머니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듣는 이야기가 그래요.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내가 겪어서가 아니라 그런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해준 어머니가 고마워요. 지금 우리는 반대잖아요. 맨날 조심하라. 그게 안타까운 시대에 살고 있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도 당장 여동생이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나를 만나러 오면 야단치고 그래요. 어린애들이랑 통화하면서도 뭘 조심해라 이렇게 얘기해야 되는 것도 정말 마음 아프죠. 나는 그렇게, 그런 얘기를 별로 안 듣고 성장한 게행운이었던 거 같아요. 우리 어머니는 항상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했거든요.

 

우리 어머니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하면, 서울이라는 곳에 어머니가 혼자 왔을 때, 어머니가 길을 잘 모르니까 오빠 집까지 모르는 사람이 데려다주고 했어요. 시대가 그랬는지, 지금은 다른 모양으로 변화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들, 별볼일 없는 것 같은 삶들이 어느 순간순간 발견해내는 선의의 빛. 그런 것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아요. 그게 쌓여서, 그때 만나고 헤어져 다시 볼 일이 없는 그 사람한테도 간직되는 순간이 된다는 거죠.

 

 

 

 

 

 

소설 속, 독자의 자리

 

소설을 읽으며 먹는 것이 곧 삶이 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 여인이 말을 잃은 주인공에게 차려준 상차림이 그랬고, ‘어두워진 후에에서 낯선 남자에게 차려주는 여인의 소박한 상차림이 그랬습니다. 독자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면 어떤 음식을 대접하고 싶으신지요.

 

내가 좋아하는 상은 이런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땐 생일 때.. 받던 밥상인데 삼색나물이나, 조기, 김 구운 거. 그리고 미역국, 맑은 미역. 그리고계란찜이나그렇게 있는 밥상 너무 소박한가?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밥상이에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밥상이면, 이게 선물도 그렇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선물이면 실패하는 게 없듯이. 장조림도 넣을까? (웃음)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데요, 어떤 소설로 만나뵐 수 있을지, 다음 작품 이야기를 살짝 여쭤봐도 될까요?

 

2011년은 작가생활 27년 만에 처음으로, 올해는 글을 쓰지 않는 안식년을 가져보자 했던 해예요. 그러니 2012년에는 이제 글 쓰는 해를 만들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이라고 할 순 없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또 마음 안에서 부딪치고 있어요. 그 전에... 단편을 한편 쓸 거예요. 제가 뭘 보고 느꼈다고 해서 그게 바로 작품화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오래오래 쌓이고 나오고, 되기를 기다리고, 그래요. 2011년이 나한테 굉장히 많은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해이기도 했어요. 그 이야기들이 작품화 될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전에 내가 쓰려고 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알라딘에도 독자분들께서 남겨주신 메시지가 많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라고 말씀해주시는 주은맘님, 신경숙 작가님을 닮고 싶어 작품을 필사중이라는 april,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작가님의 글을 읽곤 한다는 정은혜님, 구로공단, 쪽방생활, 산업체 학교 등의 글을 읽으며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벌꿀함유님, 신경숙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온 마음으로 울어보았다는 지니님. 여고시절 만난 신경숙 작가님의 글이 평생 지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책읽는장여사님. 이렇듯, 신경숙 작가의 글을 아껴읽는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한테는,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 정말 질문을 수없이 해보고, 질문을 하고 난 다음에도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그 일에 항상 가까이 가려고 하고.. 그 일에 자기 자존을 깊이 걸었으면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사인회 같은 데 가면 독자 분들이 가끔 찾아와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요. 내가 <깊은 슬픔>이나 <풍금이 있던 자리> 냈을 때 나이가 서른이었으니까, 그 무렵부터 계속같이 해왔던, 해왔다고 했었던 분들이죠. 얼굴이 아무래도, 시간이 쌓여있는 얼굴로 변했겠죠. 그럴 때면 같이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그래요. 아까 말했듯이 시간을 함께 통과해온 사이인 거잖아요. 내 작품들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 20년 전에 썼던 작품도 지금 독자들과 함께 호흡할 때 내가 가장 기쁜 건, 그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줬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한 묘한 안도감그런 것도 있고 그래요. 독자가 나에게는 매우 큰, 힘이죠. 우리도 인제, 강이 이렇게 있다면작품이 가운데에, 강처럼 있다면 양쪽에 서서 서로 빛이 나게 살자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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