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서재를 뜨겁게 달궜던 뜨거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애도 여행을 떠났던 남자, 시즈토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죽음을 똑같이 애도했던 남자 시즈토. 당신은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구에게 감사해했습니까? 누가 당신에게 감사를 표했습니까? 겨울부터 여름까지, 이 편지가 다시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컴퓨터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는 텐도 아라타가 한글자씩 손으로 눌러 쓴 진중한 답신을 소개합니다. - 편지 전달, 번역 : 문학동네 출판사 | 질문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애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인공 시즈토靜人의 독특한 캐릭터는 이 소설을 이루는 근간입니다. 시즈토에게 의도적으로 '조용함(sizu,精)'이라는 속성을 부여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즈토>는 사람의 죽음과, 그것도 생면부지인 사람의 죽음과 마주 선 인물이기 때문에 그 행위도, 마음도 경건하고 정갈한 자세를 취하는 것, 즉 <靜>한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그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려고 한 것뿐인데도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끄럽게 하고, 때로는 분노를 사고, 반발을 사는 등, 다른 사람들의 삶을 종종 어질러놓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비적인 의미로도 그의 이름을 ‘조용한 사람’이라고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것은 중의적입니다만, 일본어 발음으로 <靜>은 <鎭>과 같습니다. 진혼(鎭魂), 혼을 달래다의 <鎭>입니다. 
 

 

 


소설 속 인물은 조용함과 시끄러움으로 이분될 수 있습니다. 다카히코, 시즈토 같은 조용한 사람도 있지만, 레지같이 밝고 활달한 성격의 등장인물도 나옵니다.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 같은데, 애도하는 사람의 애도하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조용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왁자지껄한 연대와 조용한 위로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시나요? 


등장하는 인물을 유형화해서 표현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시즈토를 중심으로 주위에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까. 또 반발과 공감, 분노와 정애(情愛) 등, 감정의 드라마가 전개되는 데 어떤 인물들이 어울릴까…… 그런 고민 끝에 꼭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로 등장인물은 태어났습니다.
  ‘시끄러운 연대와 조용한 위로 중 어느 편에 더 가치를 두는가’ 하는 질문은 솔직히 대답하기 어렵군요. 사실 그런 비교에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고, 원래 비교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애도한다’는 ‘애도하는 사람’의 사상에 비춰보면, ‘어느 편에 더 가치를 두는가’ 하는 질문에 제가 거북함을 느끼는 것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애도란 늘 늦기 마련입니다. 시즈토의 말대로 ‘ 한발 늦은’ 애도가 아닌 다른 행위가 세상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시즈토의 <애도> 행위를 ‘한발 늦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죽기 전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 찾는 자신의 행위가 항상 한발 늦다고 부끄러워합니다만, 가까이에서 그를 줄곧 지켜보아온 나는, 외려 그의 ‘애도’는 요즘 세계의 주류 가치관에 대항하는 사고방식으로, 그것을 꾸준히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긴다는 의미에서 조용하지만 적극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행위는 물론 ‘국경 없는 의사단’, 기아대책본부 등의 활동이나 지뢰철거운동 등의 적극성과는 다릅니다. 다만 다르다고 해서 그의 행위를 소극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애도’와는 다른 행위로 사람들을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각종 운동과 자선 활동, 또 개인적인 자원봉사 활동은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애도하는 사람』에서 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고방식, 새로운 애도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뜻밖의 변화가 사람들에게, 사회에, 세계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온화하게 제시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작품에서 시즈토는 일종의 성자처럼 보입니다. 애도 행위를 계속하기 위해 시즈토는 감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작품 후반 유키요와의 관계는 의외였습니다. 결국, 그 이후에도 시즈토의 생활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시즈토와 유키요가 함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시즈토를 ‘성인(聖人)’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청년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 청년이 우연히 사람의 죽음에 이끌렸다,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까지처럼 타인의 죽음에 무심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해도 그 고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가 누군가의 죽음에 성실하게 맞설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우선 <애도>라는 행위를 시작한 것입니다.  


 유키요와 만나고 또 그녀를 통해 사쿠야와 알게 되면서 시즈토의 내면은 크게 변화합니다. 그들 둘과 만나고 또 헤어지면서, 애도와 마주선 자세가 보다 진지해지고 ‘애도’가 정말로 세상에 필요한가 고민하기도 하고, 과연 의미가 있는가 머뭇거리기보다 일단은 계속 행동하자, 타인의 죽음에 맞서자, 죽음들이 넘쳐나는 현실 세계로 걸어들어가자…… 행동의 끝에 대답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하고 굳게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유키요도 시즈토와의 만남과 사쿠야와의 진정한 이별을 통해 공유하게 되죠.   


 시즈토는 사람들에게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행위를 위선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반발할지…… 죽음에 맞서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고 그것을 곧 삶과 맞서는 새로운 방법으로 받아들일지. 또 그를 ‘성인’으로 보고,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해 자신들과 별개라고 생각할지……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처럼 사고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와 같은 여행할 수는 없어도 날마다 접하는 뉴스나 세계의 주류 가치관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바라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지.
 그의 존재를 앞에 두고 어떻게 생각할지에 따라 독자들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자기 모습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쿠야와 시즈토의 공통점은 작품 속에서도 언급되지만, 이율배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퍼에고의 극단적인 면이라는 점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쿠야와 시즈토, 유키요 이 세 사람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더한다면 사쿠야의 최후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요?     


 내가 등장인물을 표현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에게 존재감이 있는가…… 설령 망령이더라도 확실히 그곳에 존재한다고 느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인물끼리 만나고, 부딪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지점에서 이야기의 활력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사쿠야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하면, ‘네게서 태어나고 싶다’는 것 말인가요? 그렇다면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참고로 나는 등장인물을 표현할 때, 시즈토든 사쿠야든, 각자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며 자기 말을 내뱉게 될 때까지를 기다립니다. 그들을 계속 키우는 거죠. 충분히 키워서 이제 나의 사고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때, 즉, 그들이 그들 나름의 사상과 경험으로 생활하고, 행동하고, 발언하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원고를 씁니다. 

 

 


마키노처럼 시즈토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데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도하는 사람의 애도하는 행위를 피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시즈토의 말대로 피해자를 향해 세 번, 그 이후에는, 가해자에게도 애도하려 한다면 그때 피해자가 느끼는 분노도 확실히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 시즈토의 행위는 타인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은 자족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작품에서 시즈토는 자신의 행위를 ‘자기만족입니다’라고 작품 속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행위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할까요? 자기 마음이 편치 않아 위선이다, 자기만족이다, 하고 마키노처럼 공격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요? 사람들은 그때 시즈토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내면에 자리잡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죄악감이나 원죄감, 많은 죽음에서 시선을 돌렸던 일에 대한 껄끄러움을 그의 행위가 자극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시즈토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애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죽인 사람을 애도하는 경우가 생기겠지요. 그때 그걸 안 유족이 분노를 느낄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러나 그것이 피해자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즈토는 유족의 감정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감정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죽인 범죄자는 그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누구는 애도해야만 하고, 누구는 애도할 필요가 없는가…… 그 선을 어디서 긋고, 누가 그을까요? 


 한 개인의 생각으로 선을 긋는다면 이미 모든 사람을 똑같이 애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과잉방어로 살인을 한 사람…… 교통사고로 어린아이를 친 사람…… 전쟁에 징집되어 명령을 받고 사람을 죽인 후 그 행위를 줄곧 후회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따돌림이나 거짓말로 누군가를 자살에 이르게 한 사람…… 사랑에 눈이 멀어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 무심한 말로 누군가를 괴롭힌 사람은 어떨까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상처입힌 적이 없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고요. 설령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런 놈을 애도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애도해야 하는 사람과 애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개인적인 생각으로 구분한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이고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을까요?
 유명인의 죽음은 진중하게 보고 일반인의 죽음은 가볍게 본다…… 전쟁에서 죽은 한 영웅의 죽음은 진중하게 보고, 전쟁에서 죽은 많은 병사들의 죽음은 가볍게 보고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타국의 10만 인의 죽음보다 제 나라 축구대표의 승패에 더 연연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주위 사람들이 진지하게 여기지 않거나 얼른 잊어버리라고 할 때는 깊이 상처받는다……  
 지금까지의 그런 가치관이 반복될 뿐이지 않을까요? 


 시즈토는 자신이 사람을 재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범죄의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그 범죄자를 미워할 권리도 없다고 합니다. 범죄자를 미워할 권리는 피해자와 유족에게 있으며, 생면부지의 자신에게는 미워할 권리도 없을 뿐더러 재판할 권리는 더더욱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범죄자를 범죄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애도합니다. 모든 사람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그 ‘생명’을 애도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찬반양론이 있겠지요. 하지만 찬성하든 반대하든 논쟁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요?
 (시즈토는 성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성인이나 위인들조차 그 말과 행동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텐도 아라타, 당신은 누구입니까? 

 


전작 영원의 아이를 오 년 동안 쓰고, 이번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칠 년에 걸쳐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처럼 속도가 중요시되는 시대에 시즈토처럼 천천히 글을 써온 것이 놀랍게 느껴집니다. 칠 년간,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을 동등하게 애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진정한 애도란 가능한 것일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시도하고 헤매는 시행착오의 나날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사건 사고 현장을 시즈토처럼 걸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시즈토가 되어 그날 뉴스에서 알게 된 망자를 애도했고, 애도 일기도 삼 년 동안 계속 썼습니다. 
 그동안 뭔가 세웠다가 허물고, 세웠다가는 또 아니다 싶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이미 써놓은 원고 삼백 매를 전부 버린 적도 있습니다.  


 칠 년간 단 하루도 휴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시즈토 같은 새로운 인물을 좇아간다는 게 행복했습니다. 오히려 글을 쓰지 않는 게 더 괴로울 정도로, 시즈토의 세계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그의 세계를 깊이 느끼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시즈토는 지금 이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바람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에, 공평하게, 냉정하게, ‘애도 행위’를 바라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가벼운 질문입니다만, 한국판 장정이라든지 표지가 어떠셨는지요.   

 한국판 장정 정말 훌륭합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책을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는 애도하는 사람처럼 질문해보겠습니다. 어떤 책에게 사랑받으셨나요. 당신은 어떤 책을 사랑했나요. 텐도 씨는 어떤 책에 감사를 표했나요. 텐도 씨 인생의 책, 최근 주목하는 책은 무엇인가요? 어떤 책이어도 좋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만화책만 봤습니다. 만화광이었지요. 형도 둘이나 있어서, 철이 들고 보니 집이 온통 만화책으로 가득하더군요. 아무튼 자나 깨나 만화였습니다. 그 시절 만화는 오늘날 일본 만화 문화나 애니메이션 문화의 근간이 되는 작품들로, 지금 돌이켜봐도 아주 수준이 높았습니다. 지금은 거장 혹은 명장으로 불리는 천재들의 전성기 시절 작품을 동시대에 흡수했지요. 


  그다음에는 영화광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자나 깨나 영화였죠. 그 시절 영화 역시 드라마성이 확실한 작품과 사상적으로도 깊이 있는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어린 시절 머릿속에 고스란히 흡수했던 것이 지금 글을 쓰는 상상력의 큰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책을 읽어도 영화 원작 정도, 그러니까 문학청년은 아니었지요.
 영화를 위한 기초로, 연극은 일찍부터 공부하고자 해서, 그리스 비극(특히『오이디푸스 왕』), 셰익스피어(특히『맥베드』), 그리고 일본의 조루리음곡에 맞추어서 낭창하는 옛이야기 작가․지카마쓰 몬자에몬(특히『소네자키신주』)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거기서 요소를 빌려온 적도 꽤 있고요. 


 소설을 읽게 된 뒤로 영향을 준 작가를 꼽자면, 외국 작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 일본 작가로는 이시가와 준, 사카구치 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마르케스나 샐린저, 오에 겐자부로, 나카가미 겐지, 고노 다에코, 미시마 유키오, 무라카미 류 등을 비롯한 여기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작가분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책이라면, 『밤과 안개』의 작가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라』를 비롯한 여러 작품, 『죽음과 죽어감』의 퀴블러 로스의 여러 작품, 톨스토이의 『글 읽는 날들』등을 기회가 될 때마다 읽었습니다.
 다만 새로운 작업에 들어가면 내 공부에 급급해서 소설은 잘 읽지 못하고, 논픽션 계통의 책을 자료 삼아 많이 읽게 됩니다. 
 

 

 

 

 

 

 

 



애도하는 사람은 마키노, 준코, 유키요, 이렇게 세 사람이 시즈토를 관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중 독자들에게 가장 호평을 받은 에피소드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에피소드는 무엇입니까?  



 가장 호평을 얻은 에피소드는 독자마다 달라서 어느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글을 쓴 작가의 입장에서도시 모든 인물이 사랑스러워 이 인물이 특히, 라고 말할 수 없고요.
 다만 병을 앓고 있는 시즈토의 어머니 준코의 에피소드는 함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의학적인 사실, 그러니까 치료법이나 병세가 악화되어갈 때의 심신 상태에 대해서는 특히나 잘못된 사실을 쓰지 않게 주의해야 했습니다. 과거에 투병했던 분이나 그 유족, 현재도 투병하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그래서 준코의 에피소드는 의료 관계자나 병원을 취재하고 끊임없이 관련서적을 읽고 완성했습니다.
 


 
당신의 일상생활이 궁금합니다. 글을 쓰지 않을 땐 보통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지요.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대부분 집안일을 합니다. 집안일을 제대로 하는 것, 한 시민으로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은 작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집안일을 제대로 하는 것, 일반시민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성실하게 보내는 것’이 현실의 여러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바라보는 눈을 길러준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의 등장인물을 현실감 있게 표현할 때도 그 눈이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문학계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만, 특히 친분이 두터운 작가나 교류하고 있는 작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국내외 작가 가운데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는지요. 

 

만나면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는 작가는 많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으니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작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연극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많습니다.   


 주목하고 있는 한국요…… 작가로는(굳이 말씀드린다면) 영화 쪽에 관심이 있는데요. 양국 영화는 일본보다 수준이 높고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의 재능에 감탄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송강호 씨가 마키노 역으로 나오는 영화 『애도하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면, 하고 상상도 해봅니다. (시즈토는 누가 좋을까요. 한국에는 정말 훌륭한 배우가 많아서 선뜻 누구라고 말씀드리기가 망설여지네요.)
 
 





  

 

 애도하는 사람 이후, 우리는 누구일까요?

  



애도받지 못할 삶이란 없다는 이야기는 세상에 죽어 마땅하다고 여길 만한 사람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 선상에서 사형제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는 말로 들린다’고 하셨는데, 사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결국 누구나 죽지요. 지금 이 인터뷰를 읽고 있는 사람 중에 백 년 뒤에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도 또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수십 년 뒤면 죽기 마련입니다. 그 사실을 새삼 깊이 고려하고 삶의 지표로 삼아 시즈토의 삶의 방식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제도에 대해서는 차마 서술할 수가 없군요. 짧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문제이지요. 다만 이런 생각은 가끔 합니다. 
 자기 가족을 죽인 범죄자를 미워하는 것은 유족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벌을 주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지요. 그러나 가해자를 사형에 처했다고 해서 유족의 슬픔이 정말로 치유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 허무함은 가해자가 어떻게 되든 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려 걱정스러운 것은 사건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가해자는 이미 사형되었으니 유족들은 이제 그만 슬퍼하고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유족은 언제까지나 슬퍼할 권리가 있습니다. 가해자의 사형 여부와 관계없이, 그 슬퍼할 권리를 주위 사람들이 제한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가해자의 유족을 위한다면 우선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돌아가신 분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것,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그 훌륭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고 유족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범인이 처벌됨과 동시에 유족에 대해서도 피해자에 대해서도 잊어버립니다. 여러 명의 피해자가 나온 큰 사건의 경우, 범인의 이름은 기억해도 피해자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애초에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시즈토의 행위는 그 점 또한 환기시킵니다.

 

 



인터넷 서점 엠디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특별하지 않은 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수십 권의 책이 쏟아져나와 저희 손을 거쳐갑니다. 세상에는 애도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책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책에 대한 텐도 씨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라져버리는 책을 마음을 담아 안을 수 있을까요? 


 작가인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인지 잘 모르겠군요.
 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는 하지만, 내 책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요.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세계 인구에 비하면 얼마나 될까요. 창작하는 자는 늘 그런 현실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네 말,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아니, 한 사람도 읽어주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너는 이야기할 것인가, 인생을 바쳐 표현에 전념할 것인가?”   
   


 대답은 예스입니다. 그것이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심히 생각하고 쓴 작품이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좋으니 그 마음에 가 닿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어느 곳에 뿌리내리길 바랍니다. 더불어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소설을 읽고 ‘써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고생한 보람이 있겠지요. 
 

 




살인과 죽음 등 충격적인 소재가 꽤 등장합니다만, 『애도하는 사람』은 이전 작품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이런 따뜻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내 창작의 바탕에는, 사람은 왜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가, 관용을 베풀며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깔려 있습니다. 『가족사냥』은 그 분노가, 『영원의 아이』는 그 슬픔이 강조된 작품이지요.
 『애도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테러와 보복의 시대를 맞아 더욱 글로벌한 감각으로 동일한 주제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태어난 작품입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해할 필요도 느꼈습니다. 세계 역사를 이해하는 것과 개개인의 속마음을 이해하는 작업과 비슷합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날조가 있기도 합니다. 강한 자, 이기고 살아남은 자가 만든 역사를 받들어온 데는 개개인의 마음의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는 사카쓰키 시즈토가 삶을 마주하는 방식을 통해, 현대세계의 주류가 된 가치관과 지금까지 세계 역사가 존재해온 방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했습니다.『애도하는 사람』은 작풍의 변화라기보다는 성장이자 심화이며, 한 편 한 편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에 귀 기울이고, 독자와 대화하듯 작품을 써온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시즈토가 살고 있습니다. 유키요처럼, 마키노처럼,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시즈토처럼 최선을 다해 타인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시적인 기분에, 또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을 읽고 마음이 움직인 많은 시즈토들이 어떻게 살아나가면 좋을까요? 
 


 이 세상에 시즈토 같은 인물이 많아진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겠지요.
시즈토라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스스로 충분히 잘 찾아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여러 곳의 수많은 시즈토들의 행동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바로 제가 진심으로 꿈꾸는 일입니다. 
 

 


 
다음 작품도 7년 이후에 만날 수 있을까요?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다음 작품을 출간하고 싶습니다. 『붕대클럽』과 『애도하는 사람』의 속편도 구상 중입니다. 머지않아 새 작품을 발표할 수 있기를 저도 바랍니다.
 지금은 규모가 작은 마약 거래에 쓰이는 작은 포장봉투를 만드는 소년과 그의 여동생, 남동생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 세상의 수많은 소년소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서로 의지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요.



 

작년도 올해도 한국에 유독 죽음이 많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마다 특별한 얼굴 모를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려봅니다. 기억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찾아 뵐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애도하는 사람』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내 작품의 독자 혹은 팬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만큼 많이 놀랍고 정말 기쁩니다. 독자적인 훌륭한 문화를 가진 한국 사람들에게 내 작품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상이나 음악, 그림 등은 비교적 전하기 쉬울 수도 있지만, 말과 글은 번역도 힘들고 전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번역자들의 역량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창작할 때는 한국 독자분들도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내게는 든든한 격려이자, 큰 자극이고, 또 성장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새삼 한국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한국어로 인사). 

   

편지 전달 및 번역에 애써주신 문학동네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텐도 아라타는 가벼운 마음으로 쉬이 도전해볼 수 있는 작가는 아닙니다. 직접 글로 써준 이 인터뷰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한 그의 글이 가닿은 단 한 명의 독자가 비단 저뿐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말한 대로, 이런 글을 써준 그에게, 또 앞으르도 계속 써줄 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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