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中 
밀물 

 


 

   “왜 그런 옛말 있잖니.” 키터리지 선생이 말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병자요, 심장 전문의들은 심장이 굳었고…….”
케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아과 의사들은요?”
“폭군이지.” 키터리지 선생이 인정했다.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잠시 후 키터리지 선생이 말했다. “그게, 네 어머니는……어쩔 수 없었는지도 몰라.”
  

그는 놀랐다. 주먹 마디를 빨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서 이리저리 문지르다 청바지에 구멍이 난 걸 발견했다. “제 생각에 어머니는 양극성 장애였던 거 같아요. 그가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진단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구나.” 키터리지 선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아버지는 양극성 장애는 아니었어. 우울증이었지. 말이 없었고. 어쩌면 아버지도 요즘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68-69)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의사가 된 제자와 나이든 선생님이 만났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에는 그들조차도 알지 못했던 그런 공통점. 제자는 잊어야 할 것들을 밀어내기 위해 다시 고향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끝을 보기 위해. 그들의 대화는 고즈넉하고 쓸쓸하다.



“나는 네 어머니를 좋아했어.”
그가 눈을 떴다. 패티 하우가 다시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마리나 앞 오솔길로 걸어가자 어쩐지 긴장감이 느껴졌다. 케빈의 기억이 맞다면 그 앞은 가파른 암벽으로,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하지만 그거야 그녀도 잘 알겠지.
“알아요.” 케빈이 키터리지 선생의 크고 지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도 선생님을 좋아하셨어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했어. 똑똑한 분이었지.”
그는 이런 대화가 얼마나 지속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를 알았다는 점은 그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뉴욕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도 그랬어.”
“뭐가요?” 그가 인상을 쓰며 검지의 주먹 마디를 잠시 입에 갖다 댔다.
“자살.” (70~71p)
 

 


그들조차도 알지 못했던 그들의 '공통점'을 공유한 사람 몇을 알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신입생 환영회는 무척 즐거웠다.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고, 새롭게 시작될 대학생활에 대한 꿈도 커졌다. 확실히 무척 즐거웠었다고 기억한다. 스스로의 치기에 놀랄 만큼 술을 아주 많이 먹었고,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뻗어서 드러누웠다. 새벽녘이었을까. 엄마가 그런 나를 황급히 깨웠다. 부고(訃告)였다. 자기 전 술이라도 좀 깨보려 주워 먹었던 시큼한 귤. 그 불쾌함이 알코올과 섞여 입속에서 지독한 맛을 냈다.
  


총과 아버지의 자살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오……자비!……방아쇠를 당기지 마오, 그리하면 나는 평생 당신의 분노로 고통 받으리니…… (83p)

 

갓 중학생이 된 아들과 초등학생 딸이 있었다. 내 입학식이었던 그 날은, 잔인하게도 그 아이의 중학교 입학식 날이기도 했다. 새로운 꿈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충분해야 했던 날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아버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리라 생각했다.

죽음 이전의 삶이 어찌나 평온하고 보잘 것 없는지, 아이 아버지는 정성을 다해 교복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는 3년 후에 입어도 충분할 커다란 교복을 입고 쪼그려 누워 있었다. 저 교복을 입었던 아침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왜 그 삼년을 함께 살아줄 수 없었을까. 교복이 조금이라도 더 몸에 맞게 될 때까지라도. 아이는 자는 내내 헛소리를 했다. 아버지가 보인다는 아이의 말에 그 애의 할머니는 가슴을 쳤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렁이는 거대한 물결 속, 움직이지 않는 뭔가에 발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패티가 보였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고, 치마가 허리께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를 향해 뻗었다가 그를 놓치곤 다시 뻗었을 때 케빈이 그녀를 붙잡았다. 물결이 잠시 잠잠해지더니 파도가 다시 그들을 뒤덮었다. 케빈은 그녀를 세게 끌어당겼고 패티는 그 가느다란 팔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85)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 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 격렬하게 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오, 미친, 이 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이여!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86) 


세상은 언제나 슬프게 돌아간다. 그리고 새 시대의 여명은 언제나 있다.(78)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이 좋았다. 열세 편의 연작 단편 중에서도 특히 이 단편이 좋았다. 세상엔 여전히 슬픈 일이 끊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새 시대의 여명은 그럼에도 존재하리라 믿고 싶으니까.  

그 아이가 이 소설을 봐줬으면 좋겠다. 이 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에도 여전히 새 시대의 여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의 슬픔을 나 역시 기억하고 있노라고 그 애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알고 있다고. ‘당신의 분노’로 고통 받고 있을 다른 누군가의 얼굴도 떠올린다. 그들에게 이 소설이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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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격조했습니다. 앞으론 서재 업데이트에 힘쓰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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