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밤, 리모컨을 돌리다 우연히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았다. 결혼 따윈 싫다던 손예진의 마음을 돌려놓은 건 김주혁의 어설픈 프로포즈가 아니었다. 그랬다. 그 순간 그들은 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 새빨간 비더레즈 티셔츠를 입은 청춘의 가슴을 터질 듯 가득 채운 문구는 바로 대!한민국!  
  철 지난 영화를 보자 비로소 떠올랐다. 그 계절의 머쓱함이. 우리 선수의 이마에서 흐르던 시뻘건 피에 욕지기를 내뱉고, 축구공 하나를 만들기 위해 베트남 소년 하나가 얼마나 부당한 노동을 하는지 따위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이한 열정. 열정은 가끔 많은 것을 잊게 한다. 올림픽의 몸값은 바로 그 '기이한 열정'을 배경으로 한 얘기다. 

 

  올해들어 세상은 온통 올림픽 얘기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일본이 가까스로 세계의 인정을 받고 일등국가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자신처럼 세상일에 무심한 젊은이도 나라가 자랑스럽고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 (18p)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도시는 이상스러운 열기에 휩싸여 사소한 불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감내한다. 노동자는 초과근무를, 주부는 수도제한을, 시민은 치안 강화를.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연인의 도피처로 사용되었던 그 아키타현 출신의 곱상한 도쿄대생 시마자키 구니오는 형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한다. 평생 따뜻한 말 한 번 건네주지 않았던 배 다른 형은 평생토록 노동자로서 일하다 끝내 필로폰 과다 투약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구니오가 딱히 형을 대단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구니오는 이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형이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형의 삶을 직접 체험한다. 그리고 드디어, 모종의 '행동'에 나선다.

"도쿄하고 아키타는 같은 나라도 아닌 것 같아. 한쪽에서는 올림픽을 앞두고 축제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는데, 한쪽에서는 애비가 먼 도시에 나가 허덕허덕 몇 푼 벌어 부쳐주면 그걸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잖아. 하느님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 (99p)

  시마자키 구니오의 건너편 세상에 스가 다다오가 있다. 같은 도쿄대 동급생이며 대대로 경찰 간부인 명문가의 자손인 그. 텔레비전 방송국에 근무하며 호스티스와 연애를 즐기는 그는 아키타 같은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을 계기로 도쿄 올림픽을 위협하는 불온한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조금씩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다 그곳에 숫기없는 대학 동창생 시마자키 구니오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쿠다 히데오의 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니오를 둘러싼 여인들 이야기, 노동현장 인부들 사이의 유대감, 남색가에게서 다이너마이트를 얻기 위해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는 장면 등에는 여전히 오쿠다 히데오스러운 쫀득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태생이 발랄한 것 같은 이 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엔 이번 작품은 제법 진지하다. 도무지 발랄하게 만은 살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1964년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까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다른 게 있다면 불공평을 언급하는 자체만으로도 촌스러워지는 세태 정도. 해리는 귀엽고 신애는 구질구질한 게 우리들의 정서 아닌가. 시마자키 구니오의 반역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더욱 그 불공평이 공고화된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이 아닐지. 도쿄 올림픽을 위해 도시 미관을 해치는 노점상을 밀어내는 걸 당연히 감수했던 그들처럼, 우리 역시 도시의 쾌적함이란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아시아인 최초로 장거리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한다. 선수들의 성취를 보며 또 다시 감동하고 환호한다. 그 사이 우리 안의 기이한 열정은 우리의 눈을 슬며시 덮어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면 생활은 무척 쾌적해진다. 스스로의 처지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소설 속 노동자들이 그랬듯, 대학 나온 사무직들은 다른 거라며 시마자키 구니오에게만 유독 친절했던 건설회사 신입사원이 그랬듯.

  자기 멋에 취해 새벽에 갈겨 놓은 미니 홈피 일기처럼, 열정이 지나간 자리엔 대개 머쓱함이 남는다. 가끔 겁이 난다. 아주 먼 훗날 머쓱한 기분에 작은 소리로 반성하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우리의 기이한 열정 뒤에 가려져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게 무엇이었는지. 시마자키 구니오의 반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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