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를 처음 접했을 때는 수험생이었다. 아침 자습이 너무도 지겨워 신문이나 보며 어설프게 뺀질대다 박민규를 만났다. 신문 지면에서 문학상 수상자라는 이름으로 만났던 박민규. 그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땐 혼란스러웠다. 그의 글과 '문학상'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고아함과는 몇 광년은 떨어져 있는 듯했던 그의 문체는 참신하지 못한 일개 수험생 나부랭이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창의적이었다.
끝없이 늘어지는 1982년에 대한 소개를 보면서도 이전에 암기한 춘향전의 '장면의 극대화'를 떠올리던 때였다. 그런 수험생 나부랭이에게도 그의 글은 "재미"있었다. D-100을 가리키는 달력을 한장씩 떼어내는 대신 한장씩 책장을 넘긴 건 무엇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호사를 누리며 그가 무척 특이한 작가라고 생각했고, 특이하기만 한 작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승률 1할 2푼 5리가 아닌 삶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는 9월의 내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재미난 소설보다 훨씬 더.
처음 그를 만났을 땐 그와 이토록 오래도록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박민규라는 특이한 작가는 그의 문학을 정의하려는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채로운 행보를 이어갔다. 그의 행보 덕분에 호사스러운 취미가 더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카스테라'에 대해 밤새도록 토론하던 기억이 대학생활의 한 페이지에 있고, '누런 강 배 한 척'을 읽으며 가족의 상실을 정리했다. Y2K 바이러스가 범람하니 컴퓨터 날짜를 꼭 변경해 놓아야 한다는 앵커의 안내를 들었던 세기말이 아직도 떠오르는데, 어느덧 2010년이다. 그리고 박민규는 드디어 <이상 문학상>을 받고야 말았다. 이제야 깨닫는다. 새로운 세기의 10년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냈음을.
박민규의 <아침의 문>은 여전히 키치적이고, 여전히 빠르며, 여전히 과격하다. 그렇지만 이 글은 충분히 아름답고 고상하기도 하다. 그의 말마따나 '재수'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세상이다. 재수도.. 재주도 없어(15p) 마음 대로 죽지도 못하는 인생. 주민등록증을 가진 괴물, 학생증이며 졸업증명서며 명함을 가진 괴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20p)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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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낸 단어가 인간이 아닐까, (2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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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고개만 주억거리게 되는 인생. 그러나 우리는 바닥의 콘크리트보다도 무뚝뚝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36p)에 계속 이 삶을 살아낸다. 인생과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죽음과 탄생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이런 방식으로 변주해낼 수 있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아니 놀라기에 앞서,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속에서 무언가 뜨겁고 붉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박민규는 꿈을 꾸라고 말하지도, 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꿈 같은 건 없다고 조롱하는 편. 심의를 피하지 않고 말하자면 꿈이라고? 조까. 하고 물고 있던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껄껄대는 편. 그런데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박민규의 글은 '아침'이라는 타이틀에 잘 어울린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라고, 그는 말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꿈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 삶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인생이 계속 될 것만은 틀림없이 믿는다. 꿈을 꾸거나, 혹은 말거나. '잔디 엄마'(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中)에게도 삶은 반드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잔디'(아침의 문 中)가 말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녀 역시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일 터이니.
박민규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무게감이라면 죽도록 싫어할 것 같은 작가 박민규의 이름에도 어느덧 무게감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렇지만 박민규는 독자들이 자신을 사랑하거나 말거나, 계속 무규칙 이종의 길을 걸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러니 마음놓고 사랑하련다. 나는 박민규가 좋다. 그가 어떤 글을 쓰거나 혹은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