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출간을 앞둔 김연수 작가의 작가의 말 전문을 먼저 소개합니다. | 제공 : 문학동네 출판사












작가의 말


1962년 5월, 삼수군의 협동조합에서 일하던 백석은 『아동문학』에 「나루터」라는 동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압록강 변에서 나무를 심고 길을 닦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십 여 년 전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에 그 강을 건너가던 ‘나이 어리신 원수님’을 떠올린다. 

‘이 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그 가슴 속에 터지듯 불끈/맹세 하나 솟아 올랐단다—/<<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당시 북한의 문학잡지에 실린 다른 시에 비하자면 이 정도는 노골적인 찬양시가 아니”다. 하지만 1956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백석으로서는 처음으로 현실의 수령을 호명한 시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또한 이것은 마지막 찬양시, 아니, 살아생전 그가 발표한 마지막 시가 되고 말았다.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를 마침내 쓰는 마음과, 그뒤 삼십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옛말과 흑백사진과 이적표현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기행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들은 건 연변 출신의 연주자인 김계옥이 옥류금으로 연주한 <눈이 내린다>다. 이 곡은 원래 가곡이었는데, 문경옥이 옥류금 변주곡으로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평양음악학교의 피아노 선생이었다가 해방 뒤 레닌그라드음악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작곡가로 명예로운 일생을 마쳤다. 소설 속 피아니스트 경의 모델인 이분은 1979년에 죽었다. 

또 자주 들은 노래는 일본 가수 아와야 노리코(淡谷のり子)의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人の気も知らないで)>다. 구혼에 실패하고 함흥에서 영어 선생으로 지내던 시절, 학생들은 종종 백석이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고 했다.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눈물도 감추고 웃으면서 이별할 수 있는/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눈물 마르고 몸부림치는/이 괴로운 짝사랑/남의 마음도 몰라주고/야속한 그 사람.’ 유행가 가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청춘의 고뇌도 마찬가지다. 백석보다 다섯 살 많았던 아와야 노리코는 말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99년에 죽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곡은 저먼 브라스가 관악기로 연주한 바하의 칸타타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Jesus Bleibet Meine Freude)>이었다. 자료를 찾다가 두 장의 사진을 본 뒤로 그 선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는 1957년 재건 지원을 위해 함흥에 체류한 동독인 레셀이 촬영한, 폭격으로 파괴된 서호의 수도원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1932년 함경도 덕원 신학교 축제 때 관악기를 든 학생 악단을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앞의 두 곡은 백석이 들은 것이 확실하지만, 덕원의 신학교 악단이 연주하는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그가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기행은 1937년의 어느 여름날, 해변에 누워 이 곡을 듣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이오덕이 엮은 아름다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국민학교 2학년 박춘임이 쓴 「햇빛」으로 시작한다. 책에는 이 시가 1958년 12월 21일에 쓰였다고 인쇄돼 있다. 이즈음 북한의 백석은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내 나이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동갑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기행에게는 덕원신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들려주고 삼수로 쫓겨간 늙은 기행에게는 상주의 초등학생이 쓴 동시를 읽게 했을 뿐.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그를 본다.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와, 그분이 살아오신 한 시대에 이 소설을 드리고 싶다.




2020년 여름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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