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의 ‘나’는, 작가인 오랜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 여자대학 기숙사에서의 한때를 떠올립니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다른 걸 알게 됩니다. 은희경이 쓴 1970년대 여성 기숙사 이야기, 날렵하고 새로운 장편소설로 독자를 찾은 은희경 작가를 만나 끝없이 갱신되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김경영











1977년, 현재의 이야기


오랜만에 장편소설로 독자를 찾았습니다. 출간 이후 약 보름 가량 시일이 지났는데, 출간 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책 출간 이후 인터뷰를 성실하게 했구요. 책 쓴다고 못 만났던 친구들도 좀 만나고. 그래서 인터뷰 하고, 술마시고, 인터뷰 하고, 술마시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웃음)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집필한 소설을 지우는 동안, 은희경 작가가 지워야 한다고 생각한 이야기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이야기의 방향이 궁금합니다.


처음 십여 년 전에 이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자료도 많이 모아놨고요. 또 뭐랄까, 제게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면 원하는 것에 대한 선택적 기억력이 아닐까 싶은데요. 기억을 해내다 보니 이야기에 대한 디테일이 너무 많았어요. 책으로 엮기 위해 연재분 원고를 다시 보면서 그런 디테일을 많이 빼게 됐죠. 


처음에는 청춘의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진행하다 보니 현재에 관한 이야기가 됐어요. ‘현재의 내가 과거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이런 방향으로 가게 되면서 과거의 디테일에 대한 에피소드를 많이 빼게 됐어요.




많이 줄였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인데요, 그럼에도 1977년에 대한 묘사가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인 듯 생생합니다. 장소 등이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곳의 풍경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어요. 은희경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1977년 대학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기억을 하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물론 자료를 찾은 것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제가 그때가 강렬한 시기였기 때문에, 특히 그 시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할 때 실제로 저는 열아홉 살이었는데요. 갓 스무 살, 서울로 와서, 고향과 부모를 떠나서, 지금까지의 미성년의 삶을 떠나서, 내가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가는 독립된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에너지가 많았던 것 같아요. 최초로 자기 자신을 프로그래밍하는 시기여서, 기억력이 집중적으로 그 시기에 몰려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977년에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위대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미팅을 하고, 방학이면 기차를 오래 타고 여행을 가고, 실패하고 틀어지는 모든 과정들이 거시적이거나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어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섬세하게 느껴졌어요.


소소하고 섬세한 기억들을 남기고 싶었어요. 77년이라는 해를 재현하려는 의도보다는 개인들의 내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40년 전을 회상하면 뭔가 유형화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전형이 아닌, 그 사람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내면, 욕망도 있었고 개성도 있었던 고유한 내면을 그리고 싶어서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에피소드가 부딪치는 모습을 그렸어요.




정세랑 작가가 추천사에 남긴 “은희경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국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나와 닮은 목소리를 드디어 만나 그이의 차분하지만 낯설고 독보적인 말에 과녁처럼 관통당하는 일이다.”라는 문장처럼, 1977년의 이야기인데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사십년 전 그 시절은 이랬단다.” 이런 얘기로 쓰고 싶진 않았고요, 보편적인 젊음의 이야기.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현재의 자기 자신의 좌표를 읽는 관점에서의 과거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어요.






기숙사, 사람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9쪽)가 이 소설의 첫 문장인데요, 김유경과 김희진의, 서로의 단점을 알고 있고, 사실은 서로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래 이어진 인간관계가 재미있었어요.


인간은 되게 복잡한 존재잖아요. 선악으로 딱 나눌 수도 없고, 다 섞여있고 그런 존재인데 사람들이 너무 선입견으로 타인을 재단하는 것 같아요. “나 걔하고 지금 알고 지낸 지 십년 됐어”라고 말하면 아 둘이 굉장히 친하구나, 서로 호감을 갖고 있구나 생각하겠죠.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런 다양한 관계, 인간의 다양한 면들에 대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문학작품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김희진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필스너’를 고르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지점부터 ‘은희경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실감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남과 비교해서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패턴에는 이미 익숙했다.” (17쪽) 같은 문장으로 한 사람을 설명하는 부분이 그랬어요. 특히 ‘패턴’이라는 단어는 장편소설로서는 <빛의 과거> 직전의 소설인 <태연한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상투적이지 않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을 포착해서 뒤집어보고, 그걸 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인물에 제가 많이 투영되어 있느냐는 질문도 들어봤는데, 물론 김유경에 많이 들어있지만, 김희진에게도 사실 많이 들어있어요. 특히 현재의 김희진은 소설가이기도 해서 저의 소설가로서의 자아가 많이 들어가있기도 했고요. 남을 끌어내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잘난 체 하는 모습도 제게 있어요. “다 먹어보니까 이게 최고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식으로요. 소설 속 인물 한 명에게만 나를 투영하면 저절로 그 인물 편을 들게 되는데, 여러 인물에 제가 각각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균형을 갖고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김희진 외에도 기숙사 동료들을 몇 가지 에피소드로 묘사하는 부분이 무척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전형들로 보이면서도 각각의 개성이 뚜렷해 보였습니다. 오현수의 섬세한 취향이라든지, 그 섬세한 취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곽주아라든지요. 장단점이 섬세하게 묘사되면서도 한 사람의 개성이 연쇄적으로 다른 사람의 개성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처음에 사람이 너무 많이 나오니까. 이걸 어떻게 구분을 하고. 그 캐릭터를 또 어떻게 해야할지 진짜 고민이 많았어요. 그렇다고 등장인물 수를 줄일 수가 없는 거예요. 각 개인 설명을 너무 많이 하면 늘어지니까. 관계에서 캐릭터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다듬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웃음) 짰었어요.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 소통에 폐를 끼친다."


김유경이 ‘말더듬이’라는 설정이 김유경의 회피적인 성격과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1977년 이후 김유경과 이루어지지 못한 남자친구들이며, 연락이 끊긴 기숙사 동료들은 대체로 김유경 본인의 선택으로 인연이 마무리되진 않았습니다. 첫 연애가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순간마저도 김유경은 적극적이지 않았고요.


일차적으로 말이 어렵다는 건 자기 자신이 소극적이게 되는 조건인 거죠. 제약을 갖는 거니까요. 처음에는 그런 자신의 조건 때문에 상황을 회피하다가, 결국엔 그게 자기 삶의 태도가 되어서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부딪치지 않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그런 삶의 태도를 희진의 소설을 보며 나중에야 돌아보게 된 거죠. 이전까지 알고 있던 자기 자신과는 다른 내 모습.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내가 회피하는 인간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시대의 부당함에 대한 김유경의 기억마저 무척 세밀했어요. 김유경은 여성을 ‘조강지처, 애인, 첩, 식모’로 분류해 품평하는 남학생들이 있는 도시에서 자랐고, ‘정숙, 노력, 순결’이 교훈이던 학교를 나왔습니다. 장소와 풍경에 대한 기억만 세밀한 것이 아니라, 부당하다고 느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시대에 대한 인상도 무척 정확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예전 소설인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면 “원래 세상은 이따위야” 하고 냉소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분리하는 식으로요. 예전엔 그렇게 회피했다면, 이 소설에는 나름의 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옳더라도 상황을 회피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거구나. 나 자신이 소통을 방해한 것이었구나. 그런 반성으로 나아갔다는 게 이 소설을 끝낸 후 작가로서 저에겐 후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처음에 이 소설을 쓸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아까 이야기했듯 시작할 땐 청춘의 이야기였고, 성장과 상실이 있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소설 속에서 김유경이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동안, 김유경이라는 인물이 자기합리화를 하며 상황을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냉소가 실은 많은 부분은 자기합리화, 회피 심리 기제였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의 변화가 이 소설에 있다고 봐요.






이야기의 양면, 내가 보는 빛의 방향


김희진의 소설을 접한 후, 김유경은 자기 버전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기 식의 필터로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지만, 김희진이 묘사한 ‘회피’에 대해 김유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유경이라는 캐릭터가 싫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주인공이라서 그랬을까요? (웃음) 김유경은 이야기 속에서 약자를 자처하고 있는데, 그게 실은 약자로서 주어지는 어떤 위상을 가지려는 회피였죠. 소설 속에서 자기 삶의 한계를 만들어버린 게 자신의 회피심리라는 걸 김유경이 깨닫는 부분이 있어요.


자기 단점을 정직하게 보는 부분이 좋게 보였던 것 같아요.


김유경은 자기 입장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 거고, 희진은 반대 입장에서 보는 거고 그랬겠죠. 그 둘의 이야기가 직접적인 갈등을 일으켰다면 설득력이 더 없을 것 같았어요. 어차피 인생을 보는 눈은 다른 거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가 보는 빛의 방향과 상대방이 보는 빛의 방향은 다른 것이고, 그 차이에서 새로움이 있는 것이니까요.


사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게 거의 결론 격인 것인데요, 김희진의 소설로 이야기가 끝나잖아요. 김유경이 전반적으로 소설을 이끌어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김희진의 소설로 끝난다는 점이 이 이야기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이야기를 존중한다는 느낌이 있을 것 같았어요. 김유경이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김희진을 재단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밉지 않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희진의 ‘나쁜’ 점이 서술되어 있지만 김희진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어요. 과연 김희진 입장에서 김유경은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은 친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김유경이 김희진의 도움을 받은 순간도 있었고요, 오래 친구관계를 이어오면서 김희진의 소설조차 관심이 없었던 건 김유경이 무심했던 게 아닐까 했어요. 직장생활을 하며 김희진에게 추문이 생겼을 때는 김희진의 말대로 김유경이 그를 변호해줬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김유경을 보면서 너만 잘났고, 너만 지적이고 냉소적이고, 너만 멋있게 살면 다냐. 나는 막 부딪치고, 깨지고, 내 욕망대로 살겠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김희진의 방식이 굉장히 다른 사고방식이긴 하죠. 처음에 연재로 썼을 때는, 김희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났을 때 김유경이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인데.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려고 하는 건 저 사람의 삶의 방식인데. 나까지 거기 연루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썼었어요. 이런 생각은 사실 나랑 거리 짓기를 하는 거죠. 처음엔 이런 태도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연재 후 글을 고치면서 이런 태도 자체가 나만 손에 뭔가를 안 묻히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중에 김희진의 ‘너 그때 날 안 도와줬잖아.’ 라는 대사를 넣었어요.


특정 인물의 편을 들지 않고, 그 사건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해요. 이사람 입장에선 이랬겠구나, 저 사람 입장에선 이랬구나 하는 걸 잡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선악이 분명하지 않으니 소설이 밍밍하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 저는 대신 조금 더 섬세하게 파고들려 노력하는 쪽이죠.





내가 과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현재에 어떤 새로움이 생기는지


과거의 이야기가 1977년의 이야기이고, 현재의 이야기가 2017년의 이야기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20대에서 60대는 실은 꽤 시차가 큰데요, 4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 두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특히 현재가 2017년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제일 아쉬운 점은, 십 년 전에 처음에 쓸 때는 오십 대 초반으로 쓰려고 했어요. 근데 이게 십 년이나 미루어지면서, 결국 육십 대 가까이 되어버리니까, 이십 대와 육십 대는 너무 멀더라고요. 오십대로 했어야 했는데, 조금 너무 멀어진 느낌이 들어서 아쉽더라고요. 2017년인 이유는 그 시점이 연재 시점이기 때문이에요. 현재적인 시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아무튼 소설 속 시점이 2017년이므로 주인공은 50대 후반이라는 점. (웃음)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서사라는 점에서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서사 영화 <벌새> 와 함께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90년대에 데뷔한 작가인 은희경 작가가 기억하는 90년대는 어떤 느낌일까요?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 <벌새>와 함께 이야기하는 리뷰를 보았어요. 수동적인 주인공이 아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이지적인 자의식이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았어요. 남성 주인공이, 역사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끄는, 그런 이야기가 70년대에 대한 이야기의 주였던 것 같은데요. 이런 여성 서사를 통해 충분히 사회 이야기며, 그 당시의 억압된 분위기며, 개인이 자신의 고유성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새의 선물>이 95년에 나왔어요. 작가가 어떤 작품을 때의 관점은 쓸 그 당시의 관점일 테고, 90년대의 제가 <새의 선물>을 쓸 때의 관점은 그 당시의 관점이었겠죠. 지금 제가 보는 건 또 다른 관점일 테고요. 그때는 좀 냉소적으로 세상을 봤던 것 같아요. 세상이 안 바뀌니까. 나라도 좀 물러나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세상을 본 것에 대한 반성이 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내가 회피했던 것 때문에 그 문제를 가지고 지금 젊은이들이 아직까지 싸워야 한다는 게요. 그때의 나는 그 방법(냉소)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내 또래 중에는 희진처럼 자기 욕망 구현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도 있고요. 세대간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내 냉소가 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게 달라진 점인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하셨듯 십년 전에도 이 책을 쓰셨고, 계속 너무 오랫동안 쓰셨다고 작가의 말에도 적어주셨는데요. 왜 이렇게 유독 오래 걸렸는지, 그리고 그렇게 오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꼭 완성하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 쓸 때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청춘, 성장 같은 키워드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쓰려고 보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왜 이 이야기를 써야 하나, 이게 잡히지 않았어요. 77년을 재현한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 답을 못 찾았다가, 쓰기 시작할 때쯤 아 이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이 소설은 “내가 과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현재에 어떤 새로움이 생기는지에 관한 얘기야” 생각하고 보니 방향이 잡혔어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소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작가로서 누구나 꼭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저는 유년에 대한 이야기를 <새의 선물>을 쓰면서 썼는데, 유년은 관점을 만드는 시기이지 실천을 하는 시기는 아니잖아요. 독립된 개인으로서 세상을 맞이한 청춘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프로그래밍하는지, 그 얘기를 꼭 쓰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3년 전에 ‘강남역 사건’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등을 접하며 그런 것들이 저를 자극했어요. 내가 왜 2017년에 1977년을 써야 하는지, 그 동기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그때 해결하지 못했고, 실패했던 것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그래서 젊은이들이 싸워야 하는구나. 그렇게 동기가 생겼어요.




그런 의미에서 결말이 특히 좋았습니다. 2017년 이후 2019년까지 우리의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김희진의 소설 속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김유경이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한 빛이었다.’ (339쪽)라고 묘시된 그 ‘빛’을 향해, 1977년에도 가닿지 못한 어떤 것들에 비로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게 되었어요.


소설을 읽고 쓴다는 건 인간을 이해하려는 거니까요. 인간은 다 다른 존재고 고유한 존재인데, 우리는 인간을 유형화해서 생각하고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김유경의 변화를, 마지막에 희진하고 같이, 빛이 모여서 가는 것 같은 장면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누가 진실이다 이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지점이 있고, 같은 방향으로 빛이 흘러간다.


사실 연재 때는 맨 마지막 문장이 없었어요. ‘환한 빛으로’가 마지막 문장이었는데요. 닿으려고 했지만 결국 닿을 수 없었던, 우리가 원한 미래가 오지 않았던 장면으로 끝냈었는데, 희진의 소설을 통해 희진의 인생과 유경의 인생이 모아지는 부분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김희진과의 우정이라든지, , 2017년 이후 김유경의 삶에서 새롭게 생겨날 인간관계라든지,, 이 이야기 이후에도 새로운 인생이 이어질 거라는 점이 좋았어요.


내가 과거를 보는 눈을 바꾸지 않으면 나의 새로움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과거는 완결이 된 게 아니죠. 내가 과거를 보는 눈을 바꾼다는 건 내 맘속에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바꾼다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과거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보는 눈을 바꾸면 과거가 달라질 거예요. 그렇게 과거를 보는 눈을 바꿈으로서 나의 현재에도 새로움이 있는 거죠. 우리가 과거를 다시 보면서 희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그게 내 인생의 새로움이 된다면 희진과의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다를 수 있겠죠. 과거의 빛이 나의 현재를 갱신한다는, 그런 이미지를 주고 싶었어요.





과거의 빛이 나의 현재를 갱신한다는 것


은희경을 읽고 자랄 여성 독자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은희경 작가가 함께 읽고 싶은 젊은 소설가, 특히 여성 소설가가 있다면 이에 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후배 작가들하고 좀 친한 편이라, 한 스무 명은 말해야 안 서운할텐데… (웃음) 최근에는 황정은 작가 소설을 좋게 읽었고요. 김연수 작가의 <시절일기>도 잘 봤어요. 엘리자베트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 라는 소설도 좋았어요. 최근엔 그런 섬세한 소설이 좋더라고요. 섬세하다는 걸 흔히 감정적으로 섬세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섬세함은 정확한 거거든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더 세밀하게 본다는 건데요, 더 세밀하게 본다는 것 자체가 그 고유성을 본다는 거예요. 선입견으로 미리 결정하고 보지 않고, 조금 더 깊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어서, 저는 그런 섬세한 소설이 좋았어요.



















타 매체 인터뷰에서 “지금의 시대가 잘못돼 있다면 당시 시스템에 수긍하고 안주해왔던 제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보았는데요. 은희경을 읽고 자랄 앞으로의 독자에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책에서 바라는 게 뭘까 생각했어요. 물론 재미도 바라고, 새로운 생각도 바라겠지만요. 기사를 보니 리즈 위더스픈이 북클럽을 운영하면서 책을 추천하면서 한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 사람은 내가 책에서 바라는 건 ‘나를 다른 세계로 끌어당기는 우아함’  (기사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16/2019091600206.html )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공감이 갔어요. 우리는 어쨌든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대체 내가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잖아요. 삶의 질, 삶의 만족도, 관계의 만족도라는 측면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방법 중, 이런 기회를 얻기 위한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독서도 있을 수 있죠.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는 인생의 팔십 퍼센트 정도는 이 시스템을 위해 산단 말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이십 퍼센트는 시스템을 벗어난 생각을 위해서, 자기 자율성을 위해 써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영화가 됐든, 여행이 됐든, 친구와의 만남이 됐든. 책이 뭔가 그런, 실용적이지 않은 부분의 가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책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문학 작품의 미적인 구성, 사유를 이끌어가는 나름의 장치, 이런 장치를 알아가는 것이 나의 감수성을, 내가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증진시켜주는 능력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해요. 


운전을 잘하려면 운전하는 방법, 수영을 잘하려면 수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듯, 책에서 재미를 발견하려면 독서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직접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친구관계며 정보를 쫓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스템에 굴복하는 거거든요. 이 시스템이 우리에게 시스템 외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문학작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복잡하고 접근이 어려운데, 문학작품을 꼭 읽어야 되는가?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할만한 거죠. 소설 쓰는 사람도 소설이라는 게 정말 익숙해지지 않아요. 쓸 때마다 늘 신인작가인 것 같고 그래요. 언제까지나 내가 긴장을 느끼고, 뭔가를 걸 수 있는 일은 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벽을 깨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싶다고 하셨더라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벽이 무엇인지, 깨고 싶은 이야기, 작가님의 언어로 듣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하는 게 큰 벽이 되는 것 같아요. 완고함, 경직성, 이런 것들 때문에 세대간, 젠더간 반목이 너무 심해지는 것 같고요.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저쪽 생각을 좀 더 알아보자.’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사건을 보는 게 일차적으로 우리가 깨야 할 벽이 아닐까 해요. 나라는 자연인이 속해있는 집단이 있죠. 나는 여성이고, 60대가 되었고, 기성세대고, 손자가 있는 가정 구조 속에 있고, 이런 여러 가지 나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사건에 반응을 하게 돼요. ‘잠깐만,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하고 나의 일차적인 반응을 계속 업데이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인에게 내 관점을 강요하기 때문에 반목이 고착화되고, 싸우게 되고, 혐오가 생기고, 이기적이게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에도 나쁜 생각이 너무 많았겠고, 졸렬한 생각도 너무 많았겠지만 눈에 안 띄었을 수가 있겠죠. 인터넷을 통해 모든 세력이 발언권을 얻게 되면서 혐오적인 편견,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좋은 말만 보면 작가로서 나 스스로가 균형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저는 뉴스를 보면서 댓글을 많이 보는데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 사회가 너무 품위가 없는 것 같아서 사실 하루 종일 우울할 때도 있어요. 옛날엔 허세라도 부렸는데, 요즘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기 자신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내서 다 보일 뿐이지, 더 나빠진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인간에게 선의가 있고,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잖아요. 작가가 있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면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어요. 저 역시 끊임없이 저를 업데이트 하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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