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하는 인간
강웅경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매체의 발달이 가져온 제일 큰 특징은 인간의 오감 중, 시각과 청각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점이 아닐까 싶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TV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흡수는 분명, 두가지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앞에 내세우게 한다.

 감각하는 인간의 8편의 논문 중 4편에서 시각이란 용어가 제목안에 들어가 있는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나머지 4편도 시각을 제일 큰 비중으로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책 제목만큼이나 소재가, 지난해에 발간된 모든 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인간이 감각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사유또한 이제는 감각의 위에 서있어 보이진 않는다.

 저자들의 시각을 읽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우 즐거웠다. 그들의 시각이 향한 곳을 조금이나마 같이 바라봄으로서, 인식의 폭을 넓혀준 것만은 분명하다.
일단 읽으면서 평소에 의문점으로 남아있던 사항에대한 저자들의 시각은 책 읽는 재미를 더했다.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1830-1904) 가 스탠포드 대학 총장의 요청으로 동물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일을 왜 했는지,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 1864-1901) 같은 화가가 경마장을 자주 찾으며 그림을 그린 이유에대해, 나름대로 곁눈질 해 볼 수 있는 시각을 전해주는 것이었다.(32면)
시각과 색체를 통한 르네상스의 작품 감상은 비록 흑백 사진으로 인해, 시각적 의미전달이 절름발이가 되었을지언정, 텍스트의 의미는 분명 새길만하다.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을만큼 인터넷이 발달했으니, 아쉽지만, 노력해서 찾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항상 소설에대해 분석한 글을 읽을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정말 소설가들은 평론가들이 분석하듯 거기까지 생각해서 글을 썼을까? 라는 점이다. 사실유무를 확인하기위해선 작가를 직접만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게 제일 좋겠지만, 실제로 만났다고 사실을 이야기해줄 작가는 드물것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고정된 텍스트로 읽히기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독자마다 다른 느낌을 주길 바라는, 작품에 있어선 분명 욕심쟁이들이니까. ‘탁류’의 시대를 읽는 시선은 분명 도움이 된다. 식민지에대한 사고는 주석7 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본질에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기엔 시대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읽는 내내 즐거웠다. 왜냐하면, 글속에서 드러난 저자의 시선이 매우 익숙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속에서 또 다른 저자(이득재,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의 시선을 독자인 내가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교감이 저자와 독자 사이 이외에도 제 3자의 시선이 함께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첫 체험이었다.

 고대 철학자들에 관한 글을 볼 때면, 2500년 정도의 세월은, 인간의 정신적 진화나 발달이 이루어지기엔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곤 한다. 이 논문은, 두번째 육체적 이미지를 다룬 논문과 함께, 저자들이 요구하는 독자의 교양이 제일 높지 않나 싶다. 이젠 정말 정신병자 화가 자화상의 전형이 되어버린 인물 고흐(Vincent van Gogh, 1853 -1890) 가 아닌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를 다룬 것은 분명 신선하다. 인간의 육체, 병리, 그에 대한 표출이라는 소재자체는 서양의 전통적인 영혼을 집어삼키는 예술의 승화에 대한 분명 좋은 소재임엔 분명하다. 다만 무식한 독자가 감히 조금이나마 느낌을 말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아르또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그의 정신병 치료에 쓰였던 그림이 가지는 의미 분석이 얼마나 실지적으로 유용한지에 관한, 의미 파악이 어렵다는 점이다. 수많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논문이 대부분 플로베르의 작품을 다 읽었다는 사전 전제위에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역시 독자의 무식이다. 좀더 두고 볼 논문이다.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BC 270) 에 대한 논문은, 아르또와는 조금 다르다. 단 13장안에 한 철학자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담아내었기에, 반복적인 독서가 필수불가결이다. 다만 에피쿠로스가 결정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귀가 솔깃 해졌다. 분명히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에 관해, 이책에서 느낀점을 조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에피쿠로스는 순간적 쾌락이 아닌, 지속적인 쾌락을 바란것같다.(글 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것인지 발견치 못한 독자의 착각인지 모르겠기에 단정어법을 피했다),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중요시하는 에피쿠로스의 관점은 분명히, 영혼의 안정을 통한 지속적인 쾌락을 희망한듯하다.

영혼의 안정을 목표로한 에피쿠로스는 감각의 지배아래 ‘인간의 인식’을 두고 싶어했다. 절대적인 초월자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존재다. 또한, 절대적인 초월자의 인정은 윤리적으로 굉장히 골치아픈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인간의 노력 즉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신에의해 결정된 미래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바꿀수는 없다. 사람을 죽였다고 책임을 인간이 질 이유가 없어진다. 이미 신은 미리 그일을 태초부터 알고 있었고, 피조물의 자유의지완 상관없이 사람을 죽이게 운명지어져 있었던 것이니, 피조물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에피쿠로스는 신을 부정함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윤리학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사회는 물질만능의 시대다.(10년전에도 그런말을 귀에 따갑도록 들었지만, 21세기의 현재가 더더욱 물질 만능에 빠져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대의 쾌락은, 어떠한 주제보다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될 위치에 놓여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쾌락을 연장시키려 노력한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돌아보라.
영화(시각,청각), 음악(청각), 음식(미각), 운동(촉각), 향수(후각) 등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화활동은 오감을 통해, 우리의 쾌락을 연장시키는 도구들이다.

다른 감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이상학적 감각이라는 대우를 받고 있는, 시각과 청각은 육체적 쾌감보다 정신적 쾌감을 연장시키는 역활을 한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에대해 어느시대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쾌락에 정신과 몸을 맡기고, 영혼의 안정을 찾을 것인가?

매력적인 화두다. 특히나 현실적인 평안 행복을 종교를 통해 찾으려는 사람들에겐,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가져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제거’와 감각주의적 인식론은 거부감이 없지않아 생길 수 있다.

현재. 인간의 자연을 다루는 솜씨는 너무나 진보해서, 신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일인 창조의 비밀을 분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환경의 파괴는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라는 소재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재난영화 라는 장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영화속 현실이 스크린을 벗어나는 것도 시기의 문제이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논란이 될 차원의 문제는 이미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을 지배하고, 신을 부정하고, 정신과 육체의 두가지 쾌락을 동시에 손아귀에 쥐려하고 있다.

저자가 지금 에피쿠로스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안녕된 삶을 위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겸손과, (독자의 시각에서) 신에 대한 겸손이 필요한 시기임을 에피쿠로스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어서 나머지 세편은 쉽게 읽힌다. 에피쿠로스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를 통해, 육체로 가자고 주장하더니, 마지막 두 편은 실제로 육체를 다루어서 참 쉽다. 물론 쉽다고 해서, 그 시각이 다른 시각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과 남성의 육체를 통한 담론은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아쉬운 것은,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르네상스의 시각’ 이란 논문과 마찬가지로, 그림이 흑백이라는 점이다. 금발머리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는 저자와, 그것을 상상해야하는 독자 사이의 시각적 괴리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외국 대학의 출판사들을 보아도, 대학 출판사가 이익을 내기 어렵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양질의 책을 내지 않는다면, 나서서 출간할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면에서, 지금까지 책을 내온 대학 출판사의 경우. 시각적 이미지가 결여된 활자만으로 이루어진 책들이 주류를 이루어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서투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좀더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서라도, 수익을 위한 책 자체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의미에서 출판사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르네상스 – 인간을 향한 사랑과 신체 자유- 의 회복을 꿈꾸며

프롤로그 – 작품 안의 경계 종단하기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하 난•쏘•공)은, 난장이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단편은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화적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상징성을 내포한 소설에서, 길을 잃지 않고 여행을 마치기 위해서는 취사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대립적 존재들의 의미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재로서, ‘칼’을 선택하였다. ‘칼날’에서 난장이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난장이의 아들 영수가 은강 그룹 회장의 동생을 죽일 때도 사용된 칼을 가지고 뫼비우스의 띠를 종단하는 여행을 나서 보고자 한다.

1. 거인론 – 동굴이론을 통한 난장이 바로보기 –

‘난•쏘•공’에서 중심에 두어야 할 인물은 단연 ‘난장이’이다. 지금까지 난장이를 이야기하면서, 난장이의 왜소한 몸과 그에 따른 차별 속에, 억눌리고 소외된 계층을 대표한다라는 점은 쉽게 떠올려 왔다. 그러나, ‘난장이’라는 명칭에서 오는 고정된 관념 때문에, 그 이상의 담론을 끌어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난•쏘•공’안에서 난장이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고정된 관념 속에서, 우리가 사고하지 못한 난장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진정한 의미를 찾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세희가 말하고자 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담론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될 것이다.

고정된 난장이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대립적인 ‘거인’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립항에 대한 정확한 고찰을 통해, 난장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두 집 여자는 거인처럼 서서 고개를 저었다. 난장이의 키는 두 여자의 어깨 밑까지밖에 안 찼다.’ (칼날, 39면)

‘그들은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들과 악수할 때 아버지는 발뒤꿈치를 들었다.아버지가 어떤 자세를 취했건 상관이 없었다. 난장이 아버지가 우리들에게는 거인처럼 보였다.’ (난•쏘•공, 76면)

‘난•쏘•공’에 나오는 거인에 관한 표현들이다. ‘칼날’에서의 거인은 키가 작은 난장이의 육체에 대립된, 두 집 여자의 육체 묘사임을 알 수 있다. 신애가 난장이를 보호하기 위해, 사나이를 칼로 찔러 죽이려 할 때도, 두 집 여자들은, 수수방관할 뿐이다. 신애와 눈길이 마주쳤을 땐, 목을 움츠리며 피하는 육체적 거인일 뿐이다.

두번째, 난•쏘•공 단편 안의 표현은 사회적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 함으로서, 자식이 느낀 거인이란 이미지는 거인이 갖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상징성을 보여준다. 비록, 난장이를 거인으로 묘사했지만, 이것은 어린 자녀의 부모에 대한 시각으로,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이 부모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거인의 이미지를 육체적 강자, 사회적 강자로서, 난장이와 대립되는 위치에 놓는 것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거인의 표현이 난장이와 대립적 구조만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대립을 부정하는 정반대의 표현이 마지막으로 발표된 단편에서 나타난다.

‘잠시 후에 판결을 받을 피고인의 아버지는 사실은 굉장히 큰 거인이었다고 단숨에 말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243면)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중, 경훈에게 말하는 여공의 입을 통해, 조세희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난장이’는 ‘큰 거인’이다. 그렇다면,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인 난장이를 바라보는 조세희의 시각은 어떠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인가?

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신애가 ‘칼날’에서 가족과 난장이에게 ‘우리도 난장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억압 받는 사회적 입장(=약자)의 공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육체적 입장이 엄연히 다른 난장이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신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애가 사회적 입장에서 난장이와 동일시 하고 있다는 점은 알겠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두가지 있다.

신애가 왜 다른 이웃 사람들과는 달리, 난장이와 자신을 동일시 하느냐 하는 점과, 신애가 칼을 집어 들고 난장이를 구하려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같은 약자로서의 보호라고 단순하게 볼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신애는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을까? 침묵함으로서, 위해를 받지 않는 시대에, 사나이의 외침소리에도 놀라는 그녀가, 어떻게 대담하게 사나이를 향해 죽이려는 생각으로 칼을 휘두를 수 있었는가.

여기에 바로 지금까지와 다른 난장이의 숨은 속성이 있다. ‘칼날’에서 난장이와 신애가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신애는 여러 번, 가슴 두근거림과 뭉클한 감정을 느낀다. 그때마다 난장이는,

“전 이웃 아주머니들이 서로 싸우실 것 같아 피했었어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계량기를 속이는 것은 도둑질과 마찬가지죠.”, “물이 잘 나올 세상이 언젠가는 올걸요.” “자식은 난장이가 아닙니다.”(칼날, 43~45면)

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들 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희망,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간의 반목을 수수방관 할 수 는 없다는 이타심 등이 담겨있다. 이런 대화 속에서, 신애는 난장이를 이웃하고 싶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동일시가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난장이가 가진 이제까지와는 다른, 또하나의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정신적인 입장’이다. 난장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인 입장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바로 조세희가 바라본 ‘거인’의 모습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조세희가 바라본 정신적 입장으로서의 거인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그러면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 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에 좀은 더 가까이 와 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플라톤, 1997, 448~454면)

조세희가 말하는 거인의 이미지를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哲人)의 이미지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난장이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통해 본다면, ‘누군가’가 말해주어, 동굴을 빠져 나와 밝은 빛을 바라다본 철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88면)

동굴이론으로 볼 때, 지섭은 난장이를 구원의 길로 이끈 누군가에 해당하며, 지섭을 통해 난장이는 거인이 된다. 그러나, 누구나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 사람 내부에 준비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난•쏘•공’내에서는 이것을,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185면)으로 보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자’가, 지섭처럼 ‘바로보기’로 인도하는 자에 의해 ‘거인’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면, 여기에서,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꼽추나 앉은뱅이가, 난장이처럼 누군가의 인도로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거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여주는 꼽추와 앉은뱅이의 주요 행동은 ‘살인’이다. 비록, 돈에 관한 그들의 관념이 탐욕스런 투기꾼 사나이에 비할 바 아니지만(자신들의 정당한 이익만을 챙긴다.), 살인이 자애(自愛)에서 머문다는 점에서, 그들은 ‘거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세희가 말하는 거인이 될 수 있는 자의 기본 전제 조건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 신애가 목숨을 걸고 난장이를 구하려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거인의 죽음을 수수방관하기엔 그녀의 영혼이 난장이를 너무 깊게 받아 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난장이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보다는 삶을 계속 이어간, 앉은뱅이와 꼽추에 비해, 난장이의 죽음은 오히려 나약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가, 왜 자신의 목숨은 소홀히 하는 행동을 한 것인가. 다양한 시점이 사용된 ‘난•쏘•공’이지만, 주인공 난장이의 시점으로 쓰여진 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난장이가 자살할 때의 직접적 심리상태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조세희는 정확한 서술을 피함으로서, 능동적인 상상력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난장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심리상태를 유추하기 위해 하나의 시를 옮겨본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 1991, 77면)

위의 시는, 일제하에서 희망을 품었지만, 끝내 옥사를 하고만 자의 ‘절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복되는 구절은 희망에 대한 기대를 중첩시키지만, 절망하면서 끝난다. 사회적으로 억압 받는 민족, 육체적으로 구속된 몸으로서, 정신적인 자유를 꿈꾼 이의 절망은, 난장이의 상태와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난장이가 꿈꾼 세상은, 법 제정을 통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였다. 그가 가졌을 법에 의지한 사랑의 실현이, 행복동이라는 공간에서의 추방과 함께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철인은 동굴로 들어가, 다른 이들을 이끌어 나가지만, 난장이가 이 세상에서 강요한 것은 사랑 뿐이며, 이런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법에 의존하는 소극적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다만, 그와 함께한 사람들 스스로가 난장이의 진실한 모습을 알아보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난장이의 소극적 행위는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타인을 이끌어갈 능력을 가졌다는 사고를 하지 못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귀한 영혼을 소유했고, 그 영혼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난장이는 죽었다. 난장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버린, 그의 개인성, 난장이라는 멍에 속에 지워진 사회적, 육체적 짐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본다. 난장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있던 ‘김불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나는 뿌리 끝 생장 점의 이변으로 난장이가 거인이 되는 꿈을 꾼다.’
(조세희, 문예중앙 1977년 겨울호, 266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 소통 – 대립계층 바로보기 -

사회적으로 정해진 ‘법’에 따르는 사이에 자유롭게 된다라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특히 독일파 철학자나 법학자 사이에서 강하게 주장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지금까지의 현실에서 제정된 법률이라는 것은, 다분히 강자가 약자를 향해, 통치자가 피통치자를 향해 허락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中村 元, 1980, 269면)

일본의 철학자가 한 위의 말은, 바로, 김불이와 김불이의 아들인 영수 사이의 행동방식에 중요한 차이점을 보여 준다. 김불이는 법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법이 자신의 기대를 이루어주지 못하자 괴리감의 극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만다. 반면, 영수는 이성에 희망을 걸었다. 법률제정이라는 공식을 빼버리고, 교육의 수단을 이용하여 누구나 고귀한 사랑을 갖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185면)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는 근로자와 사용자간의 소통은 가능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노사간의 협상과정을 통해 다루고 있다. 사용자측과 근로자간의 대화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서 바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근로자의 요구 사항이, ‘임금 25%인상, 상여금 200%지급, 부당 해고자의 무조건 복직’(위의 책, 198면)이라는 점에, 사용자는 근로자의 요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영수 가족 모두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 도시근로자의 최저이론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현실 속에서, 근로자의 요구는 생존권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사용자측은, 이런 요구를 들어 줄 수 가 없다. 근로자를 기업이윤의 수단으로만 인식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노사협상의 부결은 영수에게, 이성적 소통의 불가능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던 그가 법에 기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위의 책, 203면)

그러나, 법이 아버지에게 주었던 절망감이 내적인 자살로 이어졌다면, 영수는 법이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던 것이었기에,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쉽게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수의 ‘살인’ 행위는 꼽추와 앉은뱅이와는 분명히 다른 행동이다. 영수가 살인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소통의 부재. 즉, 은강 그룹의 회장이 ‘인간을 인간으로 바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단절이 원인이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에서 더욱 치열해진다.

연작의 11번째 발표 작 에필로그가 쓰여진, 문학사상의 창작일기에서 조세희는 이야기를 열 한편의 작품으로 일단 끝맺은 셈(조세희, 1978, 393면)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 그가, 몇 달 후에, 난•쏘•공 연작 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제외하고는 제일 많은 분량으로,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라는 12번째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은,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과연, 무엇이 조세희로 하여금 일단락 지었다고 생각한 난•쏘•공을 서둘러 집필(=보완)하게 만들었는가. 작품 내적으로, 12번째 작품의 의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12번째 작품을 제외하고, 난•쏘•공을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