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면, 여기에서,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꼽추나 앉은뱅이가, 난장이처럼 누군가의 인도로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거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여주는 꼽추와 앉은뱅이의 주요 행동은 ‘살인’이다. 비록, 돈에 관한 그들의 관념이 탐욕스런 투기꾼 사나이에 비할 바 아니지만(자신들의 정당한 이익만을 챙긴다.), 살인이 자애(自愛)에서 머문다는 점에서, 그들은 ‘거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세희가 말하는 거인이 될 수 있는 자의 기본 전제 조건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 신애가 목숨을 걸고 난장이를 구하려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거인의 죽음을 수수방관하기엔 그녀의 영혼이 난장이를 너무 깊게 받아 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난장이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보다는 삶을 계속 이어간, 앉은뱅이와 꼽추에 비해, 난장이의 죽음은 오히려 나약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가, 왜 자신의 목숨은 소홀히 하는 행동을 한 것인가. 다양한 시점이 사용된 ‘난•쏘•공’이지만, 주인공 난장이의 시점으로 쓰여진 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난장이가 자살할 때의 직접적 심리상태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조세희는 정확한 서술을 피함으로서, 능동적인 상상력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난장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심리상태를 유추하기 위해 하나의 시를 옮겨본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 1991, 77면)

위의 시는, 일제하에서 희망을 품었지만, 끝내 옥사를 하고만 자의 ‘절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복되는 구절은 희망에 대한 기대를 중첩시키지만, 절망하면서 끝난다. 사회적으로 억압 받는 민족, 육체적으로 구속된 몸으로서, 정신적인 자유를 꿈꾼 이의 절망은, 난장이의 상태와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난장이가 꿈꾼 세상은, 법 제정을 통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였다. 그가 가졌을 법에 의지한 사랑의 실현이, 행복동이라는 공간에서의 추방과 함께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철인은 동굴로 들어가, 다른 이들을 이끌어 나가지만, 난장이가 이 세상에서 강요한 것은 사랑 뿐이며, 이런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법에 의존하는 소극적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다만, 그와 함께한 사람들 스스로가 난장이의 진실한 모습을 알아보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난장이의 소극적 행위는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타인을 이끌어갈 능력을 가졌다는 사고를 하지 못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귀한 영혼을 소유했고, 그 영혼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난장이는 죽었다. 난장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버린, 그의 개인성, 난장이라는 멍에 속에 지워진 사회적, 육체적 짐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본다. 난장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있던 ‘김불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나는 뿌리 끝 생장 점의 이변으로 난장이가 거인이 되는 꿈을 꾼다.’
(조세희, 문예중앙 1977년 겨울호, 26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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