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연구를 1권으로 하는 셜록 홈즈 전집을 차례로 읽어가면서 언젠가는 끝이 날 홈즈와의 만남에 늘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홈즈의 죽음.. 아니 실종… 드디어란 말은 좀 잘못인 것 같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일은 아니였으므로…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의 실종이 죽음이 아닌 단지 7권의 홈즈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다시 돌아옴을 위한 약속인 것이다. 이 책도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왓슨의 기억에 의해 씌여진다. 회상록이라는 제목처럼 그 동안의 홈즈의 사건들을 단편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책은 실버 블레이즈를 비롯해서 어떻게 홈즈가 실종됐는지 말해주는 모리어티 교수와의 한 판 승부인 마지막 사건까지 11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해결 사건도 들어있다는 것이지만 솔직히 1권부터 4권까지의 장편들보다는 사건의 깊이감이 덜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편의 어쩔 수 없는 점일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홈즈 마니아이고 팬이라면 그의 사소한 사건 하나라도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홈즈의 죽음으로 시리즈를 끝내고자 했던 아서 코난 도일도 독자들의 끊임없는 요청으로 결국은 홈즈를 다시 살려냈으니 말이다. 홈즈의 숙적 천재 교수 모리어티와의 한판 승부가 짤막하고 아쉽게 마지막을 장식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홈즈도 섣불이 대항하기 어려운지 이젠 홈즈보다 모리어티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하다. 홈즈의 귀환에선 간교한 그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하며 7권의 첫장을 편다.
에코를 만난 것은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졌던 데에 비해 무척 늦은 시기였다. 작년 이맘 때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책으로 푸코를 알게 됐으니. 그 책은 제목만큼이나 유쾌하고 명징한 책이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 선입견이라는 건 언제든지 우리 뒤통수를 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만 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영화를 먼저 본 덕분으로 결말을 알고 있었던지라 그와의 두번째 만남은 <푸코의 진자>로 시작됐다. 아~ 난해했다. 불어, 라틴어 등의 원어들이 단지 한글로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 번역의 의미인지 안그래도 내용 자체도 난해하기 그지없는데 따라 읽기도 버거운 그 언어들은 인내력을 매번 극한으로 몰고가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중세 성당 기사단에서 비롯된 비밀 결사가 현재에까지 은밀하게 맥을 이어오면서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 계획을 실현하는데 푸코의 진자가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지구 내부의 은밀하고도 절대적인 힘이 있어 그 힘을 지배하기 위한 여러 다툼으로 모든 역사적인 일들이 설명된다고 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그와 무관하지 않고 세계 대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황당한 내용은 마치 유사종교(類似宗敎)와 같은 이미지의 그들 비밀 결사에겐 진리와도 같다. 3류 출판업에 종사하는 주인공들은 광신도와 같은 그들의 믿음을 비웃으면서 한 술 더 떠 그들의 믿음을 정교하게 짜집기한 '계획'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여러 세기에 걸쳐 자기 자신들이야말로 그 계획의 일부였다고 확신하는 그들은 발명된(?) 계획의 덫에 걸리고 충실하게 수행하기에 이른다. 계획 속의 지도를 찾는답시고 온 세계를 들쑤시고 급기야는 그저 반 장난으로 계획을 발명한 주인공들을 뒤쫓기에 이르는데…. 언제나 수 많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는데 지나지 않은 시대의 방관자였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벨보는 계획을 발명함으로써 그의 손으로 새로를 역사를 쓰게 된다. 비록 그 최초의 역사에 재물이 될 수 밖에 없었지만 어쩌면 그 또한 스스로 선택하고 만든 역사의 한 부분이였을지도 모른다. 실재하지 않았던 계획이었지만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에 의해서 수행된다면 그 계획은 이미 존재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 한계가 모호하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속에서 정작 줄거리를 이어가는 핵심적인 내용만 보자면 그 두께를 3분의 1만으로도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은비학이나 연금술 등의 난해하고도 장황한 글들은 그저 쓰는 사람 마음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 같다. 인내와 끈기로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서도 작가가 우리에게 무얼 말하고자 했을까 애매했다. 에코는 작품과 독자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독자들과 작품을 가로막음으로써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 그렇담 난 어떤 해석을 할까? 믿음…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에겐 현실적인 존재의 유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뒤죽박죽인 그들의 의혹들도 거미줄처럼 잘 짜맞추면 논리적이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신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잘못 여민 첫 번째 단추처럼 별 생각없이 발명된 그들의 계획처럼 역사나 운명은 얽히고 섞여서 종국에는 제어할 수 없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듯 하다. 이쯤에서 폴 오스터의 작품들이 생각나는 것은 작은 우연이나 한 사건에서 일파만파로 확장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이 되버리는 그의 소설들과 에코의 이 작품과의 유사성 때문인 것 같다.
나비가 바다를 건너다니… 세상에는 저런 거짓말도 있구나.. ‘한국의 나비’라는 TV다큐멘터리를 보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남편이란 존재를 털어버리기 위해 무작정 떠나온 중국에서 아이러니컬 하게도 남편의 뒷모습인양 뒤따라간 어느 남자의 흔적은 붉은 색 문신하는 집에서 멈춰져 있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소금기 가득 머금은 찢어진 나비의 날개가 문신의 견본으로 장식되어 있다. 나비가 바다를 건넌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였나 보다.나비 문신을 하고자 하는 그녀에게 주인은 언젠가 나비 문신을 한 사람이 다음날 바다에서 몸통은 사라진 채 허우적대던 팔 다리만 남아있었다며 극구 말린다. 바다를 건너는 나비를 믿지도 않았던 그녀가 그녀 몸 안에 스스로 생채기를 내며 문신을 하고자 한 것은 찢겨진 나비의 아픔이 새삼스럽지 않았음 이였던 모양이다. 그녀에게도 눈부신 시절이 있었다. 25세, 그 빛나던 나이에 그녀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그와의 결혼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의 눈부신 25세를 한 순간 빛을 잃게 하는데 한 몫한 그녀의 그…패기만만한 그녀의 남편은 사표를 던지고 나온 후 3년 동안 실업자였다. 3년 동안 그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를 달라지게 한 것은 다름아닌 현실 속에서 무력한 자신을 처절히 알아야만 하는 모욕과 굴욕이었다. 재취업한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휴일도 없이 일에 파묻혀 사는 그는 일에서 만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자신의 작은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한 안간힘은 아니였을까?어느 날 술에 만취한 그는 울부짖는다.-빌어먹을… 젠장… 이게 전부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말야… 그런데 이게 전부 더라구.. ‘그와 그녀의 소통할 수 없는 엇갈림은 그가 말한 ‘이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느라 갈기 갈기 찢겨져 몸통만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허우적거림을 포기할 수 없다. 포기란 곧 바다에 빠짐을,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만한 시선은 진작에 찢겨진 날개와 함께 사라졌다. 그에게 남은 건 망망대해 속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빈 몽뚱아리 뿐이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그런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어린 시절 처형 장면을 본 이후로 한 쪽 눈이 멀어버렸다는 남자. 죽음을 본 눈은 더 이상 삶을 볼 수 없어서 스스로 멀어버렸다. 남아 있는 눈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살아서 못 볼 것들을 모조리, 남김없이 다 봐야 한다고 일생을 살아가는 남자. 죽음만큼, 아니 더 치열한 삶은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 남음에 대한 치뤄야 할 과제일지도 모른다. 바다속에 곤두박질 치든지 아니면 죽을 힘을 다해 날개짓을 하든지 선택해야만 한다. 팔다리가 없어 마주 안을 수조차 없는 몸통뿐인 그를 그녀는 과연 안아줄 수 있을까? 찢겨진 날개의 나비와 그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안아줄 수 있는 연민이다. 뚝뚝 떨어지는 것이 눈물인지 소금물에 절인 바닷물인지 모르겠다..
단지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만으로 슈베르트의 음반을 주저없이 고른 적이 있다. 죽음과 소녀라…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청순하고 처절한가.. 그런 이미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이 슬픔과 애절함으로 뒤범벅이 된다. 환희와 기쁨을 찾아도 힘들 판인 세상살이에서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슬픔 속으로 빠져들려 하는 심리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어쩌면 다른 이의 비극성에서 위안을 삼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실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같은 제목의 ‘죽음과 소녀’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검은 옷의 인물이 상처입고 지저분한 소녀를 포근히 껴안고 있는 모습..에곤 실레는 191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클림트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 화가 중 한 명이다. 28살의 젊은 나이에 당시 전쟁에서보다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인풀루엔자에 감염되어 나흘만에 천재적인 생을 마감한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부터 안정된 결혼생활등의 영향으로 화풍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그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두려움의 소재인 죽음과 성은 항상 그의 그림의 모티브였다. 욕망과 금기의 자극적인 주제들을 뒤틀리고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들이, 역시 엽기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물론 그 관심이 예술적인지 단순한 호기심인지에 따라 평가가 판이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의 그림의 기괴함이 좋다. 괴기스럽고, 어긋나버린, 편하지 않은 부담스러움이 좋다. 결코 세상 속에 함께 하지 못한 채, 한정 없이 밀려나야만 하는 그림 속 이미지들이 좋았다.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결코 관찰자들을 편히 놔두지 않는다. 우리는 역겨움과 뒤틀림으로 거북해 하고, 때론 환멸까지 느끼면서도 결코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일부를 보게 되기 때문은 아닐까?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의 처지와는 다르게 실레는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또한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둘러싸여 경제적으로도 궁핍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세상으로부터 천재성을 인정 받지 못해 고뇌하고 고통 받는 불행한 예술가로 각인되기를 바랬다. 그의 속내는 이런 식이였지만 여전히 그의 외모는 깔끔한 옷차림 이였고 사치스러웠고 지나친 나르시즘적인 자기애를 가졌었다. 몇 년 동안 헌신적이던 정부 발리와 미련 없이 헤어지고 순진한 처녀와의 결혼을 감행한 것을 보면 그의 이중적인 가치관은 지극히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다. 이처럼 늘 충돌하며 갈등하는 가치관들이 그의 그림의 적지않은 부분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그의 그림들이 심리학자들에게 연구용으로 사용되곤 한다는 것을 보면 무리한 상상은 아닌 듯 하다.화가는 늘 그림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지속됐던 조화를 이루지 못한 내면의 갈등은 비루한 일상에서 자신을 표현할 대안을 찾지 못하는 소극적인 현대인들에겐 오히려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함이 된다.
‘모르는게 약이다’ 라는 말이 있다. 알면서도 어찌 해결할 도리가 없을 땐 차라리 모르는 게 맘 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종종 애써 외면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힘이 있겠는가?!그러나 세계적 석학인 노암 촘스키는 부조리를 외면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에겐 충분한 희망이 있으므로..미국은 9 11 테러 이후 북한, 이라크 등의 국가를 불량 국가로 규정했다. 미국은 자국에 해가 되는 의미에서의 적국들로서 그들 국가를 지칭했지만, 촘스키는 불량국가를 선별된 적국들에 대해 적용하는 프로파간디(선전)로서의 용법이외에 스스로를 국제질서에 구속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국가들에 적용한다. 즉, 촘스키의 의도대로라면 내부 규제가 없는 강대국들이 바로 불량국가인 셈이다.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왜 불량국가라 불리어 마땅한지 명확한 사례와 증거들을 제시하며 주장한다.우리는 매일 신문과 뉴스를 접하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인다.21세기에는 빠른 정보의 유통으로 세계 속에서 더 이상 무지로 인한 배척당함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방송 매체들은 911테러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한 테러를 알려줬고 이라크와 북한의 핵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을 갖게 한다. 보스니아에서의 내전은 민족과 종교가 다른 역사가 오랜 세월 내밀하게 곪아 드디어 터져버린 것이었고, 콜롬비아는 늘 마약 때문에 정부군과 게릴라간의 끊이지 않는 총격전이 벌어진다.우리가 아는 진실들은 이런 것들이다. 그 뒤에 어떤 음모가 있는지 도대체 우리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이 책을 보면, 우리가 얼마가 거짓되고 위선적인 정보에 휘둘렸는지 잘 알 수 있다. 미국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지원한 것은, 40년 전 인도네시아가 농민층에 기반을 둔 좌파 정당의 정치 참여까지 허용할 만큼 민주적이고 독립성이 강하였기 때문이였다.또한 콜롬비아 플랜의 목표는 콜롬비아 내부의 사회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농민에 기반을 둔 게릴라 병력을 제거하고 콜롬비아의 자원에 특혜를 받으며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미국의 이익과 연결된 엘리트들이 콜롬비아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이처럼 그 이면에는 항상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 국가를 흔들어대는 놀라울 만큼의 이기심들이 있다. 그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설립된 여러 국제기구들의 의사도 무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이러한 강대국들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정부정책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또 하나의 권력 형태인 지구적 자본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의 둔화와 생산성 후퇴와 금융 위기등이 발생했다.전후 경제 질서를 해체한 것은 다른 대안이 없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촘스키는 이것은 이기적 사기에 불과하다고 한다.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특정한 사회 경제적 질서는 인간이 결정하여 만들어 낸 결과이고 따라서 그러한 결정은 수정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그렇지만 과연 촘스키의 바람대로 역사를 바꿀 자신의 이익을 뒤로 하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