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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ㅣ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시모프를 읽을 때는 "이 사람 외계인 아니야?" 싶었는데 테드창은 진짜 인간이구나 싶다. 내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가 제시한 새로운 세계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고민에서 출발했음이 느껴지는 까닭도 있다. 과학이 만능이라고 믿거나, 자연과학이 최고라고 믿는 교만이 없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SF는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 과학소설이며, 자연과학만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가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기도 하는데, 낯설고 새로운 문제를 그가 제시하고 함께 생각하는 느낌이 좋다. 한번쯤 뭉게뭉게 상상해본 문제를 또렷히 바라보는 느낌도 역시 좋다.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많은 생각이 뻗어 나가 읽는 내내 즐거웠다. 레온처럼 삭발할 정도는 아니지만^^; 들뜬 마음에 미열이 나는거 같았다.
이제는 왜 야웨가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인간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는지를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 '바빌론의 탑' 중에서
새로운 신관(神觀)도 놀랍다. 때로는 지극히 종교적이고, 때로는 풍자를 하면서. 소설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화해 가능성을 가장 가까이 본 것 같아 놀랍다. 특히 '지옥은 신의 부재'는 신앙인으로 살며 가장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서늘하지만 무릎을 치게 되는 결론을 던진다. 그래.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신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종교인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종교인스러운 의문을 가졌는지?
난 소설 읽으면서 작가가 무신론자인지 아닌지 맞추는 것에 자신있었는데 이 사람은 도무지 모르겠다. '일흔 두 글자'에서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생물을 창조하는 개념을 봐도 그렇고. 만약 그가 신이나 신의 본질에 가까운 것을 믿지 않는다면, 18년차 신앙인으로서 테드창만큼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할듯. 쩝.
그는 퓨전의 달인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언어의 습득과 어의문자라는 낯선 언어 형태, 그리고 인과율과 목적론의 양면적 해석에 대해 어떻게 저렇게 절묘하게 잘 섞었나 싶다. 딸의 이야기, 그리고 헵타포드와의 이야기가 이루는 장단이 멋지다. 명명과학과 전성설을 결합한 '일흔 두 글자'나 4차원 공간개념과 고대우주관을 결합한 '바빌론의 탑'도 그렇고.
가장 어렵게, 가장 느리게, 가장 재밌게 읽었던 작품은 '일흔 두 글자'였다. 어릴 적, 전성설과 같은 발상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꼭 발생학이 아니더라도 하루 종일 그게 생각나서 괴로웠다. 그런 생각에 빠져본 사람만이 호문쿨루스의 공포감을 알꺼다. ㅠ_ㅠ
"페르마의 원리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빛의 행동을 목표 지향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치 광선에 대한 계명인 듯한 느낌이랄까. '네 목표로 갈 때는 도달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할지어다' 하는 식으로 말야." - '네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그의 창작노트를 본 느낌은, 좋은 글을 쓰려면 역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 모든 작가들 나름대로 노력하는 부분이겠지만,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단편 하나를 위해 수십권을 읽은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기 위해 지식을 쌓아 그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즐거웠을까 싶다.
또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영감을 받은 것도 많더라. 고등학교 한 때 우주와 철학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생각이 났고, 그 시절이 그리웠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친구가 많다기 보다는 아무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 능력이 있어 보인다.
오랜만에 멋진 책을 만나서 너무 즐겁다. ^^ 이 책을 빌리긴 했지만 당연히 살 것이다. 행복한책읽기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지. 참, 언어의 장벽을 허물려는 노력이 비치는 번역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