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추위와 굶주림에 관한 에피소드가 줄기차게 나온다. 빨치산들을 가장 괴롭히는것도, 마을에 남은 여자들이 남편이나 애인을 배신하게 하는것도 모두 그러한 두려움 때문이다. 본능의 문제가 삶의 중심으로 대두되는 상황이 단지 전쟁만은 아니다. 짐승같은 삶을 아무리 고찰해 나가더라도 전쟁이 가져다 준 인권과 존엄으로의 궤적에 가 닿을수도 없을 것이다.

전선은 멀다. 전우나 적군이 아닌 피해자, 밀고자, 약탈자, 동지, 형제, 꿈, 과거가 그저 감자를 둘러싸고 궁색한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정을 통하는 것이 곧 감자다. 밀고도 감자다. 남편의 죽음도 감자다. 감자를 외치는 아내에게 빨치산은 약탈로 응수한다. 독일군은 아내를 범하고 남편을 죽일지언정 적어도 감자를 빼앗아가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과연 유럽의 어떠한 교육이 그다지도 비인간적이었는지 충분한 예제를 제공받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는 그간 쌓여온 각자의 전쟁상을 책장마다 적절히 수혈해가며 내용을 보정하고, 빨치산의 상념이 불러온 아리송한 희망을 완성한다. 그들에게 숲 밖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폭력과 유린의 실체는 무적의 대장 나데이아만큼이나 서로를 의지하게 만드는 공포와 연대의 대물림이다. 숲속의 우등생 야네크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비약과 증식을 거듭하는 어울리지 않는 절망이고, 밤하늘에서 내려앉는 순백의 병원체다. 그들의 손과 입술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자와 장작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탄이 아니라면 어떠한 가치도 그들에겐 집단 병리학적 증후군의 추가된 이름, 지평선 너머에만 존재하는 포성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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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31 0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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