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얘가 바로 그 아이로군. 

부잣집에 하녀로 팔려가는, 영리하지만 가난한 소녀. 가난하지만 예쁜소녀. 예쁘지만 누구도 완전히 가질수 없는 소녀. 뻔한 메뉴지만 작가의 손맛이 일품이다. 소녀의 자의식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긴장감의 도구로 쓰여졌을 장치들에 여러 번 입맛을 다셨다. '위기의 하녀’를 부각시키기 위한 통속적 보조갈등의 주체인 외간 남자들의 등장도 더럽거나 저질스럽지 않았다. 심술궂은 주인집 둘째딸의 모함도 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구름이 무슨 색이지? 

그림을 배웠거나 남다른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베이직’한 이 대사에 솔깃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화가들이 늘상 경험하고 고민하는 바로 그것을 그 최초의 질문으로 보여주는, 기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별함 때문이다. 베르메르는 하녀 그리트를 창가로 인도하여 '보는 방법’을 나누어준다. 카메라 옵스큐라속의 또다른 창문도 보여준다. 하지만 붓을 쥐어주지는 않는다. 

 

날 꿰뚫어 보고 있군요. 

소설은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것으로부터 안료를 제작하다가 결국 그림의 구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을 통해 베르메르의 세계를 파헤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그리트의 입을 빌어 고백했듯, 베르메르가 아니다. 작가의 시선은 줄곧 그리트를 만지고 있다. 독자는 안료를 빻는 그리트가 양배추와 당근의 미적 질서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데자뷰임을 느낀다. 오감이 하나씩 열리며, 신비의 명화를 둘러싼 미시사적 실타래도 같이 풀려나가는 걸 느낀다. 느끼면 느낄수록 빠져든다. 그러나 욕망이라기엔 너무나 섬세하다. 

 

왜 당신은 나를 한번도 그린 적이 없죠? 

베르메르의 아내는 불같은 질투로 남편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차분한 손놀림의 베르메르는 욕망의 가격을 붓질하는 불구자일 뿐이다. 그의 아내가 잔인하도록 잦은 임신을 하는 것은 그녀의 자궁이 욕망의 쓰레기통인 이유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귀고리를 한 하녀의 초상화 속에서 남편이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부부의 시선은 초상화 위를 불안하게 떠돈다. 

 

이십 길더. 

감탄스런 존경보다는 세련된 침묵이 어울리는 화실과 그 관계자들의 묘사는 잔잔한 베르메르의 명화들이 오히려 자극적일만큼 은은하고 향기로웠다. 그리트는 분명 자신의 분에 넘치는 맛과 위험스런 정갈함을 겪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혼과 얼룩진 인생역정 같은 거대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모델과 하녀와 여자가 한몸 안에 부딪혀 박살나는 파국도, 화해도, 질곡이랄 것도, 마음을 붙잡아두기 위한 그 어떤 조급함도 없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진주귀고리의 액면가-이십길더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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