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이야말로 천안문 사태의 수혜자였다. 이념적 이유이든 정치적 편의의 이유이든, 이들은 전국적인 시위의 원인이 된 1980년대의 접근법을 거부함으로써 승자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상하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와 기업 간의 긴밀한 유대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간 부문의 발전을 촉진하는 이른바 ‘정실 자본주의‘이다. 중국에서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대등한 자본주의 유형인 농촌 기업가 정신은 주변부로 내몰렸다. 자본이 고갈된 향진기업들은 즉각적인 타격을 입었다. - P220
서구에서 관료제는 정치적 거버넌스의 전반적인 틀이 갖춰진 후에 탄생했으며, 정책 문제를 해결하고 각각의 영역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려는 목적이 뚜렷한 테크노크라시 성격의 도구였다. 즉, 관료제는 전쟁, 세금 징수, 의료 운영, 산림 관리와 같은 업무별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생겨났지 전반적인 거버넌스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중략)
반면 왕조 시대 중국의 관료제는 사회가 막 태동하여 힘겹게 헤쳐나가야 하는 연약한 시기에 생겨났다. 과거 제도의 확장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확립했다. 이 지배는 행정적이고 관념적인 지배였다. - P149
우리는 일어난 역사는 알지만 일어날 수 있었던 역사는 알지 못한다.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중앙고문위원회의 소멸로 인해 중국 정치를 위한 현실적인 개혁 옵션, 적어도 미래의 독재자가 탄생하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옵션이 사라졌다. 천안문 사태의 역효과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 P243
나는 중국공산당이 누리는 안정의 기반을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독재의 규범과 연결했다. 전통적인 가치가 독재를 강화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보다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한 가지 증거는 코호트 효과로 나타난다.1970년 이전에 태어난 중국인과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중국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출생자보다 반자유주의적이다. 정치학 및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성향은 나이와 반비례하며, 이는 197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의 성향을 설명한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출생한 사람들의 반자유주의 성향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해답은 중국의 교육 커리큘럼에 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교육 커리큘럼은 민족주의와 전통적인 가치를 더욱 지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중략) 이들이 바로 시진핑 시대의 늑대전사(戰狼) 초국가주의에 기름을 붓고 있는 집단이다. - P302
(고든) 털록의 기본적인 주장은 권의주의 정권은 이미 승계 갈등을 내재하고 있어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털록은 독재 정권은 적절한 규제가 따르는 제대화된 승계 제도가 없으니 부패하기 쉽고, 인격주의 통치와 혼란으로 퇴보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독재 체제의 선천적 결함이 독재 체제의 본질에 내재한 저주라는 의미에서 ‘털록의 저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 P304
털록의 저주는 경제학적 방법론을 정치에 적용하는 ‘공공선택이론‘의 창시자로 더 잘 알려진 고든 털록의 이름에서 따왔다. 1962년에 출간된 털록과 제임스 뷰캐넌의 공저 <국민 합의의 분석>은 이 분야의 이정표라고 할 만한 저작이다. 1987년에 출간된 <전제정치(Autocracy)>는 이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독재에 대한 털록의 유일한 저서이자 정치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접근이라고 불리는 책이다. 털록의 예측 중 일부는 놀랄 만한 선견지명이었다. 털록은 이미 1987년 초에 북한과 싱가포르가 권의주의 세습의 길로 나아가리라고 예상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7년 전이었다. - P314
독재 정권 승계의 역기능 중 상당수는 이러한 오해와 잘못된 피드백의 무한 반복에서 발생한다. 정치학자 존 허츠는 이 위태로운 상황을 ‘황태자 문제(Crown-prince problem)‘라고 이름 붙였다. 황태자로서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실하게 할지 아니면 현 통치자가 약속을 이행하기를 바라며 시간을 끌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중국공산당 역사에서는 국가 주석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나타내는 직함을 얻거나 원로들에게 권력을 양보하라고 요구하면 갈등이 촉발되어 거래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 P316
중국이 털록의 저주를 억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들인 데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첫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라는 두 거물의 카리스마와 기타 특이한 요인들이 후계 갈등의 여파를 억눌렀다. 둘째, 중국 군부가 후계 갈등의 주요 선동자가 아니었다. 셋째, 1980년대에 중국 정치가 온건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승계 관련 이해관계가 줄어들었다. 넷째, 덩샤오핑의 개혁으로 후계자 승계를 위한 규칙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에서는 이러한 조건 중 일부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털록의 저주가 앞으로 중국 정치에 검은 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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