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들의 잠
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 지음, 안진태 옮김 / 자연사랑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C는 내게 작가적 이름을 가졌다 했다. 난 B와 L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야말로 글쟁이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이름을 지니지 않았는가 물었다. C는 그들보다는 내 이름이 훨씬 근사하다고 대답함으로써, 이름 하나로 등단식이라도 치룬 양 헤실거리는, 나의 어처구니 웃음을 유도하였다. 그런데 ‘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라니. 이름만 들어도 놀라 자빠질 정도로 난해한 작품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말이다. 더욱이 이 책을 잡은 시점이 알코올에 젖어 정신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던 때라, 두 발 내디뎠다가 다시 한 발 되돌리는 장정에 끊임없이 헉헉거려야 했다. 술이 깨고도 어쩐 일인지 집중할 수 없었던 나는, 읽는 내내 허술한 정신을 타박하며 엉치를 차줘야 했음은 물론이다.

<소들의 잠>은 크레타 섬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병폐와 그리스의 민주화라는 역사적 상황을 꼬집는다. 하지만 일전에 소개했던 <라모의 조카>가 프랑스의 역사적 배경이나 철학적 배경지식 없이 읽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소들의 잠>은 이러구러한 스키마 없이도 수이 읽을 수 있다.

물질이 야기한 현대의 불치병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다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군부가 정권을 잡고 독재가 판을 치고, 국민이 흘린 피로 혁명이 꽃을 피우고, 민주 정권이 수립되었나 했더니 일각의 비리와 입신을 위해 하루아침에 진영을 바꾸는 정치인, 비대해진 차관과 정치인의 자가당략으로 침몰한 경제, 또다시 피를 쏟는 건 국민 뿐인 악순환은 이미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타이틀이 아니었던가.

다만, 작가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흉내내려한 것인지는 몰라도 살인자인 디케오스, 그의 아들 그리고리스, 피해자인 세르보스와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그리고리스에게 칼을 꽂은 마르코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역전되고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진행되는 바람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곧잘 길 잃기 일쑤이다. 그러나 헷갈려 죽겠네, 하면서도 책을 붙들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은근히 웃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구절들.

- 부당한 일을 당한 자만이 경찰이나 관리에게 말해야 한다.... 죄가 없는 사람은 경찰에게 말을 해봤자 권리를 찾지 못하므로 그저 질문을 받을 때만 예 또는 아니오 하고 답변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용건 없이 우연히 참가한 사람들은 늘 권력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며...

- 갖가지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구원책은 나무 위로 몸을 날려 새의 세계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뭇잎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시도할 때 자신의 근심을 셋 이상의 사건과 관련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나무나 근심 없는 새들의 사회도 그를 구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정의라는 것은 각자의 재산에 좌우되고 소유물과 인력의 법칙에 관련된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주지되었다.

- 결국 모든 물체가 어떻게 무게와 가치를 상실하는가를 본 것은 그가 피를 사방에 흘리며 죽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물질에 가치를 둔 삶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닫는 대목이지만, 인간이 그것을 깨닫는 시점은 언제나 뒤늦다. 삶의 아이러니다.)

- 이런 경우에 흔히 볼 수 있듯이지지 정당을 바꾼 유권자들은 새로운 신념을 보이기 위해 과장된 열의를 보이기 쉬웠다.

당신이 지금 맥주병을 손에 쥔 상태가 아니라면, 실연으로 인해 뭉개진 심장을 추스릴 수 없어 벽에다 머리통을 짓찧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금치산자나 난독증 환자가 아니라면, <소들의 잠>에 기꺼이 동참하는 건 어떤가. 당신이 눈 감고 자도 좋을 만큼 현실은 당신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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