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향기
쓰지 히토나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의식의 곤비, 사고의 곤비, 행위의 곤비. 아스팔트에 붙어있는 묵은 껌처럼 방구들에 눅진하게 달라붙은 무위의 영혼. 닦달하는 목소리가 없다면 단 한 줄도 읽어 내릴 수 없을 가난한 독서. 그 와중에 비닐 포대 위에 실린 어린아이처럼 몇 시간만에 끝내버린 질주로서의 독서.

산성미디어 출간, 쓰지 히토나리 작의 '질투의 향기' 읽다. 노란색 표지로 둘러 쌓인 책의 오른 쪽 하단은 눈사람 모양의 구멍이 뚫린 채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건 샘플 향수다. 용기(容器)를 꺼내고 난 후의 책 생김새로 말하자면 심장을 관통한 총알이 빠져나간 구멍처럼 흉물스럽다. 아, 책에까지 이런  장난을 하다니... 너무 싫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순간 순간, 내 손가락들은 익숙치 못한 허방에 빠져 허둥대곤 한다.

내용은 단순하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의심과 질투와 배신과 복수의 향기를 전면으로 드러낸 채 남녀의 사각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세련된 지적 언어가 일상의 공감대를  형성케 하고 있지 않다면 중, 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감성을  지배하던 로맨스 소설과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소설이다.

건축가 마사노 에이지와 그의 아내 사키, 치유로서의  음악을 연구하는 '나'와 아로마 테라피를 공부하는 나의 애인 미노리가 '활력의 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와 사키는 마사노와 미노리가 주고받는 눈빛을  '배 신'의 징조로 받아들이며 복수를 꿈꾼다. 복수의 도구로써 행해지는 섹스. 하지만 그들의 섹스는  '뭔가를 잠깐 착각하는 바람에 시작되는 사랑이 있다. 한편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거나 잘못 해석함으로써 시작되는 사랑도 있다.' 라는 말에서도 보여지듯 '미칠 정도로 흉폭하고 아플 정도로 부서지기 쉬운 관계'인 사랑으로 발전한다.

혼돈의 끝에 나는 '활력의 뜰'에서 쓰여질 '목신의 오후'라는 음악을 완성한 후 파리로 떠난다. 일상이 철저히 배제된 공간에서 나는 자유로운 고독에 젖어 무위의 날들을 보낸다. 그 공간에 뜻하지 않은 소나기처럼, 균열을 일으키는 단 한 방의 총성처럼 나타난 사키. 그들은 인생의 출구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산보하고 섹스를 나누며  휴식의 날들을 보내지만  '일상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노력'에 서서히 지쳐 가는 서로를  발견한다. '생활'과 닿아 있지 않고 '생활'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관계란 역시 불안과 회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란 질문을 만드는 부분이다. 질투가 만든 오해가 또 다른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외롭게 남겨진 두 사람간의 새로운 사랑을 싹트게 하지만...

메모할 것이 너무 많아 손이  바쁜 독서였다. 흔하디 흔하고, 낡아빠질 대로 낡아빠져서 이젠 누구도 더 이상 감동하거나 탄성을 지르지 않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작가는 연애 고수처럼, 연애에 달통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그 떠듦이  너무나 그럴 듯 하고 나를  들켜버린 것처럼 속엣 것들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일편 당혹스럽고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런 구절들.
-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느끼는 지루함이란, 요컨대 사람의 죽음이다. 허무에서 도망가기 위해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 속에 자신이 아직 생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

- 사랑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체제를 유지하고 붕괴를 미루자, 라는 것이다.

- 거짓말은 사랑의 기간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도구다.

- 십대 시절 의심할 것 없이 빛나기만 했던 청춘과는 달리 인생의 반환점인 삼십대는 완전히 전쟁터였어. 참호 속에서 가만히 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어. 아니,  그것보다 더 무서워....... 모든 것을 잃고 비로소 나는 자립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 뭐가 슬퍼요? 살아 있는 것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 인생이란 그런 거야. 출구를 쉽게 찾아선 안 돼. 출구는 출구가 아니야. 출구는 입구이기도 해. 급하게 서둘러도 도달할 수 있는 장소는 정해져 있어. 계속 멈춰 서 있어도 언젠가는  도달해. 그것이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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