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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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다 순간 '휙' 지나가는 최고의 언어를 낚아채는 일.

김애란의 장기가 빛나는 부분은 이런 데 있다. 최적의 언어를 잡아채 우리 눈 앞에 펼쳐보이는 일, 결국 그녀의 작품을 기다리다 읽게된 독자의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일. 

김애란 소설을 읽다보면 반짝...! 빛났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나의 어느 한 순간과 맞닥뜨리는 기분이 든다. 당시 내 경험과 느낌, 감상이 눈 앞에 김애란이 빚어낸 '언어의 옷'을 입고 펼쳐져 있다. 잊고 지낸 과거를 기억시켜 주는 일, 김애란 소설의 미덕이다.

'좀 컸다고 '으앙' 울지 않고 '훌쩍훌쩍' 울었'던 기억(<도도한 생활>), 주말에 출근하는 같은 처지의 지하철 안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모두 어릴 때 꿈이 훌륭한 사람은 못 되었어도, '공휴일에 출근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그 느꼈던 그 때 그 기분(<<침이 고인다>), 20대 초반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닭갈비의) 사리를 능숙하게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어른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던 그 시절(<자오선을 지나갈 때>).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 나는 과거 어느 순간의 나를 만나게 된다. 

그 과거가 화려하고 남을 앞서는 그 무엇일 필요는 없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 비루하고 초라한 삶이라도 그 자체의 빛이 탈색되지는 않는다.  아니, 그녀의 소설 속에서 그런 삶은 오히려 더 반짝반짝 빛난다.  그것이 나의 마음 속 거울로 들어와 반사되는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가 새는 지하방에도 고가의 피아노를 들여 놓는 자존심(<도도한 생활>), 생리 중에도 학원에서 하는 운동회에 참석해야 하는 고단함(<침이 고인다>), 노량진 재수생활의 단조로움(<자오선을 지나갈 때>), 성탄절 날 다 차버린 모텔방을 찾아 헤매는 무거운 발걸음(<성탄특선>), 하루종일 칼국수를 삶아내야 하는 피곤함(<칼자국>) 가운데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빛을 발한다. 

소설이 '김애란 식 유머'로 빚어져 있는 탓이다. 김애란은 고단하고 피곤한 삶을, 초라하고 내세울 수 없는 삶을 따스하게 바라본다. 결국 그들의 삶은 내 마음 속 온기로 남게 된다.  

단편집을 두 권 냈을 뿐인 작가에게 '다시 김애란이다'라는 도전적인 광고 문구가 붙는 것도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또 기다리게 된다. 그녀의 작품을 향한 침이 고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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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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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임.신이라는 거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 호들갑 떨며 축하할 일일까.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숭고하고 고귀한 일이어.야.만 한다고 강요 받는 일 중의 하나가 임신이라고 항변하고 있는 듯 하다 .

소설 속 '나'의 언니는 임신으로 안 그래도 팽팽한 신경이 임신을 계기로 끊어질 듯 위태로워 진다. 입덧으로 아무 것도 입에 넣지 못하는 언니는 나날이 여위어 간다. 집에서 베이컨을 굽던 동생은 집안 곳곳에서 역겨운 기름 냄새가 난다고 울부짖는 언니 때문에 집 밖에서 숨 죽이며 밥을 먹어야 한다. 먹는 게 곧 죄악인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언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먹어대기 시작한다. 듣도 보도 못한 것을 자정에 먹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고,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떨이로 구입하는 그레이프 푸르트 잼을 퍼먹으며 하루 하루를 지낸다. 

'나'는 생각한다. 그레이프 푸르트에는 농약으로 인체에 해롭다는데... 그러면서 '나'는 훼손된 DNA 염색체를 떠올린다. 

이 소설 속 '나'에게 뱃 속에 생명체는 DNA 이상이 아니며, 언니에게는 '고통'일 뿐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누구도 임신을 기뻐하지 않는다. 다만 순간 순간을 견뎌낼 뿐이다. 

이 모든 게 너무나 가슴 서늘하게 그려져 있어, 읽고나면 가슴 한 구석을 서늘한 바람이 훅 한 번 훑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같이 수록된 <기숙사>,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 역시 여성들의 심리가 차갑게 묘사된다.  

<기숙사>에서는 허물어가는 기숙사의 한 실종사건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안한 심리가, <... 수영장>에서는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앞두고 겪는 여성의 심리가 차분차분, 또박또박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섭게 그려진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한 에피소드와도 통하는 것 같다. 

작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집에 있는 싱크대  밑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다. 죽은 고양이가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싱크대 밑에 고양이가 죽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잘 보니 그것은 썩은 양파가 들어있는 망이었다. 

어둠 속에서 보인 썩은 양파와 죽은 고양이 사이. 그 사이에 작가는 자기가 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임신 캘린더>는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했고, 오가와 요코는 내가 사랑하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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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대 화성인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김옥희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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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 소설을 쓰고 한참이 지난 뒤 이렇게 말했다.
"난 <존 레논 대 화성인>을 쓴 이후 다시는 이런 소설을 못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역순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는 겐이치로의 소설들 중 이 소설은 단연 백미이다.  

<우아하며 감상적인 일본 야구>, <사요나라 갱들이여>, <겐지와 겐이치로> 등의 소설이 주는 감동이 스타일의 재기발랄함이 내용을 압도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인데 반해(사실 내용이 무의미하다) <존 레논 대 화성인>에서는 스타일과 언어의 전복에서 오는 통쾌함은 그대로이면서도 내용에서 오는 거대한 슬픔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읽고 나면 가슴이 뚫린 듯 서늘한 느낌을 준다. 

'멋진 일본의 전쟁'의 머리속을 헤집어 놓는 각종 살육의 행태들, 살인들, 시신들...은 작가인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견뎌낸 전공투 시대 -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전공투에 가담한 혐의로 반 년 간 수감생활을 했고, 그 뒤 실어증에 시달렸다. 실어증 극복을 위핸 '이것은 컵이다 이것은 컵이다'를 되내이며 언어를 '재'습득했다 - 의 은유이자 상징이고, 그 폭력은 전공투 시대가 지났다고 해서 단순히 치유 소멸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멋진 일본의 전쟁'을 괴롭혔던 살인에 대한 추억과 공포는 '멋진 일본의 전쟁'이 죽은 뒤 그대로 '나'에게 옮겨진다) 

무차별적이면서 동시에 불가항력적이고 또 우연적인 폭력이 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이 소설을 지탱하는 또 다른 한 축은 바로 성(性)이다. 

극중 '나'는 엽기 포르노 소설의 작가이고, '내'가 '멋진 일본의 전쟁'에게 치유책으로 제시한 것은 창녀 테이텀 오닐(T.O)(실제로는 '페이퍼 문'에 출연한 미국의 여배우)을 소개한 것이다.  

T.O는 '멋진 일본의 전쟁'에게 그닥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지만 T.O와 함께 일하는 '이시노 마코'는 '자본론 할아버지' - 실효성을 이미 오래 전에 상실해 사실상 사망신고를 받은 늙은이의 표본인 '자본론 할아버지', 이보다 기막힌 작명이 가능할까 - 의 원기회복에 성공한다. 

'섹스'는 '치유'인 것이면서 동시에 소설 속의 이 등식은 '모든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괴테의 예언과도 맞물린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 소설이 자신과 가장 닮아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겐이치로는 재기발랄한 어릿광대의 친근한 웃음을 지으면서 속에는 깊은 슬픔을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한다. 

이 소설 역시 언어의 전복과 의미 비틀기(일본에서 실제로 활동한 레슬러가 존재론을 고민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설 속에서는 실제로 통용되는 언어의 의미가 변주된다)로 꾀하는 유쾌함 속에 슬픔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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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의 숏컷
김지운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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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느낄 수 있는 글을 쓴 사람의 분위기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김지운 감독은, 
매우 유머러스하면서 예의 없는 것들에 짜증을 내고,
섬세하면서 감상적인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처절하게 와닿은 것은 이른바 백/수/내/공이다.   

백수 생활...  

남들이 볼 때, 특히 가족이 볼 때 정말로 비루하고 비참하며,
하염없이 땅을 헤짚는 것 같지만 그게 찬란한 빛을 언젠가는
발한다는 것을 김지운 감독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시간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먹고 생각하고 자성하고 성찰하면서
그 백수생활에서 내공이 착착착 쌓여간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하기 이전에 10년을 백수로 지냈다. 

아, 나도 놀구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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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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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알랭 드 보통이 말랑말랑한 소프트한 글을 쓰는 작가이라고 다소 폄하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이 나오는 족족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가진 편견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보통의 글쓰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마음 깊숙이 새기게 됐다. 

대상을 오랫동안 차분히, 사색적으로 응시하며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그야말로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그 시선이 가볍지 않으면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있어 그 스타일을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고 싶을 따름이다.  

**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 <호텔방(1931)>, <호텔로비(1943)>, <관광객들을 위한 방들(1945)>, <철도 옆 호텔(1952)>, <호텔 창문(1956)>, <웨스턴 모텔(1957)> 

**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안 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슬픔이 주는 기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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