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

 

가끔씩 서울에 올라가 지하철을 타면 하지 장애인이 절단된 다리를 검은색 고무로 동여매고 복음성가를 틀어놓고 손을 발삼아 힘겹게 기어갑니다. 바구니에는 백 원짜리 동전도 들어있고 천 원짜리 지폐도 들어있습니다.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너무 안타깝습니다. 거기다 복음성가를 틀었으니 모른 체 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떤 승객들은 익숙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고 또 어떤 승객들은 열심히 살라는 듯 천 원짜리 지폐를 넣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오스’ 인데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긍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마18:21-35) 어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일만 달란트를 빌려줬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니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 16만 5천 명의 일당입니다.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주인은 만기가 되어 자기 종에게 일만 달란트를 갚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종은 강원랜드 카지노에 가서 탕진을 했는지 아니면 주식투자를 했다 쪽박을 찼는지 모르지만 그 많은 금액을 순식간에 날려버렸습니다. 주인은 그 종이 쩔쩔매자 처자식들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빚을 갚겠으니 제발 참아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종은 감사하다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밖으로 나갔는데 마침 백 데나리온을 빌려준 동료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치 일당입니다. 그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보다 60만분의 1입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금액입니다. 그 종은 동료에게로 달려가 목을 거칠게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동료는 엎드려서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종은 동료가 못 미더웠는지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이 자기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러서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고 나무랐습니다.(마18:33) 그 종은 16만 5천 명치 일당을 탕감 받고도 100 명치 일당을 탕감해 주지 않았습니다. 큰 은혜를 받고도 작은 은혜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김’ 이라는 단어가 엘레오스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여러분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장애인이라고 놀리지 마시고 불쌍히 여기십시오. 입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십시오.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오스’ 인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긍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눅10:25-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에 있었고 여리고는 해발 250m 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바위가 많고 길이 꼬불꼬불하고 거리도 20-30킬로미터가 되다보니 산적들이 숨어 있기 좋았습니다. 산적들은 그 사람의 값비싼 옷을 벗기고 쓸 만한 물건을 빼앗고 대항하지 못하도록 흠씻 두들겨 팼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이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조금 지나 한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이 레위인도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들이 내는 헌금과 세금으로 생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이 있어야 왕도 있듯이 평민이 있어야 제사장도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지만 나 몰라라 외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사장이 시체를 접촉하면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되어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다고 변호하지만 이들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 도와주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지나 한 사마리아인이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혼혈인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미군 병사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사람 취급도 안했고 요즘도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알게 모르게 놀리잖아요? 사마리아인은 놀림을 받았지만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천으로 싸맸습니다.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완화시켰고 포도주는 상처의 살균작용을 했습니다. 상처를 싸매려면 천이 필요한데 어쩌면 그의 옷을 찢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옷은 비쌌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도 나눠 갔잖아요? 그 사마리아인은 응급처치를 하고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짐승에 태웠으니 사마리아인은 걸어간 게 분명했습니다. 이튿날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비’ 라는 단어가 엘레오스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돕는 행동입니다. 여러분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시고 구체적으로 도우십시오. 마음이 있다면 행동으로도 표현하십시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소독하고 상처를 싸매고 응급처치를 한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간병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고 그 사람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돕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돕는 행동입니다. 여러분도 일회성으로 그치지 마시고 계속해서 도우십시오. 우리가 지하철에서 만난 하지 장애인을 보고 안 됐다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동정심입니다. 바구니에 지폐를 넣는 행동은 구제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났을 때 또다시 돕거나 통장번호를 받아 정기적으로 후원한다면 긍휼을 베푸는 겁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긍휼이 여겨야 남도 나를 긍휼이 여기게 됩니다. 내가 남에게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남이 나에게 관심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긍휼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어 멸망당했고 또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 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흘간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고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골3:12-13) 우리가 옷을 입어야 하듯이 긍휼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긍휼하게 사심으로 긍휼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