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4 애통하는 자
마태복음을 산으로 비유한다면 산상수훈(마5~7장)은 산봉우리이고 팔복(마5:1~12)은 산정상입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설교 중에서 핵심입니다. 엑기스죠. 오늘은 4절입니다. 4절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헬라어 성경으로 직역하면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그들이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동양에서는 5복을 말하고 성경에서는 8복을 말하는데 5복은 사람이 중심이지만 8복은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복은 현세가 중요하지만 8복은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까지를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도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복은 물질적인 복이지만 8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복을 받고 물질적인 복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일까요? 슬퍼서? 아파서? 억울해서? 아니면 신세를 한탄해서? 애통하는 자는 슬퍼서도 아파서도 억울해서도 신세를 한탄해서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죄를 지었으면 회개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식사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6:31)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펄쩍뛰었습니다.(마26:33)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마26:34)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마26:35)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습니다. 가룟 사람 유다는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군병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려줬고 군병들이 달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서 저항했지만 예수님은 만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선히 끌려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찌 됐는지 궁금해 대제사장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마26:69 이하) 베드로는 깜짝 놀라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앞문으로 나가니 다른 여종이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 곁에 섰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고 갈릴리 사투리를 문제 삼았습니다. 베드로는 화를 모면하려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고 저주하면서 맹세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고, 맹세하며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더도 덜도 말고 삼세판이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세 번 말하면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모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때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신앙을 회복시키는 특효약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51편 17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요21:15 이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이 또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해서 제자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시인해서 제자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았습니다. 베드로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용서받고 다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일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죽어가는 영혼을 보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고 말경고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회개하라고 선포했지만 백성들은 듣기는커녕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렘 20:9) 예레미야는 아무리 박해를 받더라도 하나님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 유다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지 않아 주전 587(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예레미야 애가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19:41) 예수님이 왜 우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의 디도(티투스) 장군에게 멸망당해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흩어집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아셨기에 우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찰스 피니 목사님은 어느 날 시카고에 왔다가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라고 묻자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집 센 양처럼 제 마음대로 갑니다. 사람들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말도 듣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2:5,7;3:11)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듣든지 듣지 않든지 전해야 합니다. 듣지 않는다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은 힘이 셉니다.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며 흘리는 눈물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눈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여러분도 눈물로 사람을 살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로 ‘위로’ 라는 단어는 ‘곁에’ 라는 전치사와 ‘부르다’ 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곁으로 부르시는 겁니다. 우리가 사이가 나쁘면 고개를 돌리지만 사이가 좋으면 곁으로 다가가잖아요?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가까이 하십니다. 여러분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십시오.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까이 하십니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