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4:12 진영 바깥에서 사르되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 어른이 사망을 진단했습니다. 코 밑에 솜을 올려놓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곡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의사가 사망을 진단합니다. 호흡이 멈추고 심장박동(맥박)이 멈추면 심전계(심장박동에 의해 생겨나는 전류를 그래프로 그리는 기계)가 0으로 떨어질 때 사망진단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있고 죽어있고는 얼굴이 예쁜가 미운가가 아니고 심장이 뛰고 있느냐 멈춰 있느냐가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심장은 어디일까요?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는 성경의 심장이기 때문에 레위기를 알면 성경을 아는 거고 레위기를 모르면 성경을 모르는 겁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5가지 제사는 예수님의 다른 모습입니다. 5가지 제사를 알면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날로 속죄제입니다. 속죄제는 실수로 죄를 저질렀을 때 제물을 불살라 바치는 제사입니다. 고의로 지은 죄는 번제로 드렸습니다. 번제는 가죽만 빼고 모두 다 불사르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사였고, 소제는 고운가루 한 움큼(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는 제사장을 먹이는 제사였고, 화목제는 기름과 피를 하나님께 드리고, 가슴살과 뒷다리 살을 제사장에게 드리고, 나머지를 제사 드리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였습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제물의 종류(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나 고운가루)에 관심을 가졌다면 속죄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대제사장이나 장로나 족장이나 평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제는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바쳐야할 제물이 달라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같은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누구의 죄가 더 클까요? 제가 지은 죄가 더 심각합니다. 3절의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일반 제사장이 아니라 대제사장을 가리킵니다. 13절의 ‘이스라엘 온 회중’은 국가나 도시의 지도자인 장로를 가리킵니다. 제사장이나 장로가 죄를 지으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드렸습니다.(레4:3,13) 짐승 중에서 가장 비싼 수송아지로 드렸습니다. 제사장이나 장로는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고 그 수송아지를 잡아 성막 안으로 들어가서 그 피를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분향단 뿐들에 그 피를 바르고 나머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혹시 어느 쪽부터 쏟았는지 기억하십니까? 북쪽에서부터 쏟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북쪽을 죄의 근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북쪽, 서쪽, 남쪽, 동쪽 순으로 쏟았습니다. 그리고 내장에 붙은 기름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기름과 피는 하나님이 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번제는 번제단에서 불태웠고 화목제는 나누어 먹었지만 속죄제는 이스라엘 진영 바깥 재 버리는 동쪽에서 불살랐습니다.(레4:12) 번제는 번제단에서 불살랐는데 속죄제는 진영 바깥에서 불살랐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 속담에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하도 속을 썩어서 선생님하기가 어렵다는 속담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서는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는데 성경에서는 제사장이나 장로가 죄를 지어 바친 제물은 아무도 먹지 않았습니다.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막 안에 있는 번제단이 아니라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서 불태웠습니다. 그만큼 제사장이나 장로가 지은 죄는 중차대하다는 말씀입니다. 제사장이나 장로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백성에게도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해야 하는 제사장이 죄를 지었으니 누가 죄를 사해줄 수 있겠습니까?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지휘관을 먼저 쓰러뜨려야 부하들이 우왕좌왕 합니다. 사탄은 저격수가 지휘관을 노리듯이 목사를 쓰러뜨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를 노리지만 가정에서는 가장을 노립니다. 마귀는 굶주린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다니듯이 가장을 유혹해서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접대문화를 개선해야 하는데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의 60명 중에 1명꼴로 유흥업소에서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고 된 숫자가 그러니 신고 되지 않은 숫자를 합한다면 엄청난 숫자가 돈을 쉽게 벌려고 죄를 조장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자나 깨나 몸가짐을 반듯하게 해야 합니다. 잠깐 방심하면 엄청난 후유증이 따릅니다.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족장이 죄를 지으면 흠 없는 숫염소를 드렸고, 평민이 죄를 지으면 흠 없는 암염소를 속죄제물로 드렸습니다.(레4:23,28) 요즘은 암컷이 비싸지만 구약시대에는 수컷이 비쌌습니다. 족장은 부족의 지도자인데 족장이 지은 죄는 평민이 지은 죄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권사님이 지은 죄는 집사님이 지은 죄보다 무겁다는 말씀입니다. 족장이나 평민은 그 숫염소와 암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고 그 숫염소와 암염소를 잡아 그 피를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뿐들에 바르고 나머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그리고 내장에 붙은 기름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제사장이나 장로가 바친 속죄제물은 중차대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진영 바깥 재 버리는 동쪽에서 불살랐는데(레4:11-12) 족장이나 평민이 바친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성막 뜰에서 먹었습니다.(레6:26) 족장이나 평민이 지은 죄는 제사장이나 장로가 지은 죄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웠습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포청천을 보면 사형을 시킬 때 귀족은 용작두로 죽이고 평민은 개작두로 죽였는데 성경에서는 제사장나 장로가 죄를 지으면 중차대하기 때문에 더 거룩한 지성소의 휘장에 피를 뿌리고 분향단 뿔에 피를 바르고 나머지를 번제단에 쏟았으나 족장이나 평민이 죄를 지으면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를 번제단 주변에 쏟았습니다. 목사나 장로는 직분이 무거운 만큼 언행도 권사나 집사보다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속죄제에서 무엇이 예수님을 상징할까요? 번제는 흠 없는 수컷이 예수님을 상징했고, 소제는 변하지 않는 소금이 예수님을 상징했고, 화목제는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킨 예수님이 바로 화목제였습니다. 속죄제는 자신을 속죄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회복시킨 예수님이 바로 속죄제이십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몫인 기름을 번제단에서 불태웠고 피를 번제단에다 쏟았고 나머지는 진영 바깥에서 불태웠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3장 12절을 통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물이 진영 바깥에서 불태워졌듯이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 바깥에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성 바깥으로 가져나가 완전히 없애셨습니다. 속죄제가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홀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며 아들을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하나를 보며 살았는데 아들은 글공부는 하지 않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허송세월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르고 타일렀지만 아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회초리로 때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오자 자신의 종아리를 걷어 부치고 회초리로 때렸습니다. 종아리가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아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어머니를 말렸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으니 맞아도 싸다며 회초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종아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아들은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타일렀듯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이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종아리를 때렸듯이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속죄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의 피를 보고 아들이 잘못했다고 빌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흘린 피로 인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살렸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짐승의 피로도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씻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는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씻으셨는데 우리가 죄를 저질러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하나님의 반대말은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깨끗이 세차를 했는데 누가 더럽힌다면 화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속죄제물이 되시어 하나님과 우리와를 회복시키셨는데 우리가 또 다시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우리와를 단절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회복시키셨으니 우리는 죄를 멀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켜야 합니다. 제임스 패커 교수는 거룩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 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다고 말했습니다.(거룩의 재발견) 우리가 죄를 멀리하려면 신앙적으로도 깨끗해야 하고 도덕적으로도 깨끗해야 합니다. 몸도 깨끗해야 하고 영혼도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둘 다 무너집니다. 우리 올 한해는 신앙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깨끗하게 삽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