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9:19-21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예전에 사극을 봤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병상에 계신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맵니다. 아들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어머니의 입속에 떨어뜨립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신음소리를 내며 의식을 회복합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아들의 피 한두 방울로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가 살아날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피를 생명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성경도 피를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은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피를 신성시하였습니다.(레17:11)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피를 나눠 마시면 의형제가 되고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에게 먹여주면 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피를 먹어서는 안 되고 제단에 뿌리거나 몸에 발라야 했습니다.
제단에 뿌리는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속죄 제물로 가져 왔습니다. 제사장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짐승을 잡아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르고, 나머지를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피를 뿌려 죄를 용서받고 또 죄를 짓고를 반복했습니다. 몸에 바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사장을 임명할 때는 피를 몸에 발랐습니다.(레14:14) 19-20절을 봉독합니다. “너는 다른 숫양을 택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며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아멘! 하나님은 제사장을 임명할 때 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가져와 송아지는 속죄제로 드리고 숫양 한 마리는 번제로 드리고 다른 숫양은 머리에 안수하여 그 사람의 죄를 숫양에게 전가시키고 나서 숫양을 잡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통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숫양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듯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 위해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숫양의 피를 오른쪽 귓불과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습니다. 피를 오른쪽 귓불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 17절을 통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4-5절을 통해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어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에덴에서 추방되고 나서 하와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 심판을 받았고 아담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라고 속삭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마귀의 말을 듣는다면 마귀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27절을 통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귓불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우리도 귓불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오른쪽 귓불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는 퍼포먼스를 합시다. 십자가에서 피를 찍어다 오른쪽 귓불에 바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습니다. 피를 엄지손가락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역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37-38절을 통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추수할 일꾼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눈에 띄는 게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봉사할 일입니다. 찬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 사람이 찬양인도를 하면 됩니다. 어린 영혼들이 소중해 보인다면 교회학교 교사를 자청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초청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따라 다니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제자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무리보다는 제자에게 더 큰 상급을 주실 겁니다. 제사장이 엄지손가락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우리도 엄지손가락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예수님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찍어다 엄지손가락에 바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피를 엄지발가락에 바르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절을 통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을 통해 내가 너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여기까지 도우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고(삼상7:12), 현재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고(마1:23), 미래에는 우리의 길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창22:14) 제사장이 엄지발가락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우리도 엄지발가락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찍어다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귓불과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숫양의 피를 바르고 나서 피와 관유를 옷에 뿌렸습니다. 여기서 숫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이고, 관유는 깨끗한 기름인데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피를 옷에 뿌렸듯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도 예수님의 보혈을 옷에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지켜줍니다. 제사장이 관유를 옷에 뿌렸듯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어노인팅’입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이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 인데 둘 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듯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내적인 기름 부으심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기름 부으심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찬양을 올려드리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외적인 기름 부으심입니다. 내적인 기름 부으심은 반드시 필요하고 외적인 기름 부으심은 덤으로 필요합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귓불에 발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 엄지손가락에 발라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 엄지발가락에 발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피와 관유를 옷에 뿌리듯이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반대말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연말이 되면 분위기에 휩쓸려 죄를 짓는 경우가 많은데 죄를 지으면 기쁨을 상실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여 죄와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게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