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11-19 엎드리어 감사하니

뜨거운 햇살아래서 일하던 농부가 호두나무 그늘아래서 땀을 닦았습니다. 농부는 호박넝쿨에 달린 호박을 보고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을 약한 넝쿨에 매달리게 하셨담! 호박이 무거우니 땅에 닿을 것 같잖아.”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농부는 그 자리에 누워 호두나무 가지에 달린 호두를 보고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튼튼한 호두나무 가지에 조그만 호두가 달리게 하셨담! 하나님이 잘못 만드신 거 아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다 농부는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딱!” 호두 하나가 농부의 이마에 떨어졌습니다. 농부는 아픈 이마를 만지며 “아이쿠, 저 큰 호박이 나무에 매달렸다 떨어졌다면 큰일 났겠군! 하나님, 이 큰 호두나무에 작은 호두가 달리게 하신 것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 농부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지 못해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알게 된다면 결국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이 농부처럼 매사에 불평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이라 날은 더워 땀은 흐르지 물은 적어 자주 씻을 수 없다보니 피부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자주 씻지 않아 종기가 많이 났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제사장이 검진하다 보니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진짜 나병인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하면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쳤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에 걸려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았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어 사회적으로도 소외당했고, 회당에도 갈 수 없어 종교적으로도 버림받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소록도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은 암처럼 전염될 확률은 적었으나 신종플루처럼 격리되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원망하던 나병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나병환자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가셨습니다. 나병환자 10명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습니다.(눅17:12-13)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멀리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눅7: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13절을 통해 나병환자에게 병이 낫도록 안수 기도도 해주시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개떡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나병환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라.’로 이해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찾아갔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걸어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영화 [벤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시는 순간 나병이 나았습니다. 벤허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가족들에게도 돌아가고, 친구들에게도 돌아가고, 회당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 갔습니다.(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나병환자 9명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1명은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돌아갔습니다. 제사장에게 ‘정하다.’는 선언을 듣기보다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1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간 9명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이 결혼해서 낳은 혼혈인입니다. 유대인은 혼혈인을 경멸했습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는 요즘도 국제결혼을 통해 낳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은근히 차별하는데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겠습니까? 사마리아인은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에게 감사하다 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잊은 유대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눅:17-1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이 기특하셨습니다.(눅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9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다가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1명의 사마리아인은 말씀을 믿고 육신도 고침 받았고 감사를 하여 영혼도 구원 받았습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9명의 유대인들은 작은 것은 얻었지만 1명의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하여 큰 것도 얻었습니다. 황수관 박사에 따르면 감사하면 부교감 신경을 자극시켜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감사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비타민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던 비타민을 먹듯이 감사는 감사한 일이 있든지 없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영국 국교회에 매튜 헨리 목사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성경주석을 쓴 학자였습니다. 그가 쓴 주석은 3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팔리고 있습니다. 그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매튜 헨리 목사는 ‘나같이 유명한 목사가 강도를 만나다니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해!’ 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다음의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첫째, 전에는 한 번도 강도를 만나 적이 없는 것에 대해 둘째, 강도가 지갑을 빼앗아 갔을 뿐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에 대해 셋째, 저의 전부를 빼앗아 갔지만 그것이 별로 많지 않은 것에 대해 넷째, 제가 강도질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강도를 당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매튜 헨리 목사는 강도를 당했지만 그래도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거리가 있을 때 감사하지만 감사할 거리가 없어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감사할 거리를 주십니다. 우리는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는 적게 합니다. 간구와 감사는 보트를 젓는 두 개의 노입니다. 한쪽으로 기울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우리가 간구만 많이 하면 신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자라지 않습니다. 간구와 감사에 균형을 이뤄야 신앙이 전진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를지라도 감사부터 한다면 반드시 감사할 일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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