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1-19 내 양을 먹이라.

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는데 한 사람이 한 번만 목격했다면 거짓이라고 의심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여러 번에 걸쳐서 목격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은 고대 설화에 나오는 믿을 수 없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분명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워낙 강하다 보니 교인들조차도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겠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2번씩이나 똑똑하게 보여주셨는데도(요20:20,27)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친히 본 제자들조차 부활을 의심했는데 하물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성경 말씀만을 대해야하는 우리들이야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 다시 말해 갈릴리 호수로 돌아갔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자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요21:3)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찌됐든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양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의기양양했겠지만 허탕만 치지 기진맥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면 제자들이 빈 그물만 건지듯이 우리 인생도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인데 예수님을 떠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처럼 나무가 뿌리를 뽑힌 것처럼 허망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낙심해 있을 때 예수님이 새벽안개를 뚫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았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날이 샐 무렵이라 어슴푸레하다 보니 누군지도 모르고 못 잡았다고 대꾸했습니다.(요21:5)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타깝게 보시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6) 제자들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분이 하신 말씀에 권세를 느꼈습니다. 고기는 원래 어둔 밤에 돌아다니다가 날이 새면 물 아래로 내려가는데 저분의 말씀에 권세가 있다 보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물고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물에 걸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물이 너무 무거워 제자들이 들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저분의 말씀이 이성적으로는 그른 것 같았지만 저분의 말씀대로 따랐더니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신앙은 이성의 영역을 초월합니다. 이성적으로 믿기지 않더라도 신앙적으로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우리의 믿음을 연료로 삼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로켓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통해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잡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아마도 요한이 “주님이시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일하느라 벗었던 겉옷을 걸쳐 입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요21:7) 베드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제자였습니다. 말이 앞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만 한다고 싫어합니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인 제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중한 사람보다 과감한 사람을 크게 사용하십니다. 신앙은 전자계산기로 수지타산을 맞추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정해졌으면 코뿔소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허물보다는 그 사람의 열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최고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다.
다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서 그물을 끌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물고기도 구워놓고 떡(밥)도 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2) 제자들은 새벽이슬을 맞으며 야간작업을 했기 때문에 몸이 눅눅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의 몸을 녹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기 때문에 허기가 졌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와 떡을 준비해 놓고 제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시지 않고 밤새도록 헛수고를 한 제자들에게 숯불을 피워놓고 음식을 준비해 놓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에는 관대하지만 남의 잘못에는 엄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잘못을 탓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시고 떡과 물고기도 나눠주시며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듯이 물고기와 떡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정말로 부활하셨다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유령이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육신과 영혼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음식을 드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을 돌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침 식사를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21:15) 예수님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는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으로 부르실 때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요1:43)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처럼 다시 제자로 맞아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 하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6) 예수님은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근심을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요21:17)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 하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복음 18장을 통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자신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요13:37) 그 장담을 하루아침에 허물어 버리자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세터가 실수한 공격수에게 다시 한 번 공을 토스해 주듯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마음을 짓눌렀던 죄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3은 완전수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 지도자로 임명하셨고 교인들을 돌보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이 자유로워지자 그제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사명은 아무나 감당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실 때 내 양을 잡아먹으라고 하시지 않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들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주님부터 만나 신앙의 확신을 가져야 주님이 맡겨주신 교인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아직 미숙한 교인들을 돌보기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으로 키워 사명을 맡기셨듯이 우리도 신앙의 젖을 먹는 초신자들을 사랑으로 돌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릴 바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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