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16-30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자기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과 오늘날의 예배당과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세 번씩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절기(명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소나 양을 제물로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은 짐승을 제물로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어요. 그러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면서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었고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나라는 멸망했지만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회당을 세웠고, 회당에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랍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헤롯 대왕이 증축한 성전이 하나 있었고 마을마다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1년에 세 번씩 방문하여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성전이 라기 보다는 매주 모여서 예배드리는 회당에 가깝습니다. 성전과 회당과는 규모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한 반열(그룹)에 천 명으로 이루어진 제사장들 24개 반열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2만 4천 명이나 있었어요. 제사장들은 1년에 두 차례씩 일주일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년에 14일을 근무하였죠. 마을 회당에는 회당장 한 사람이 사환 한두 사람을 데리고 관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인원이 많다보니 제사를 직접 주관했지만 회당장은 인원이 적다보니 랍비를 초청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요청받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에서 목수로 사시다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요한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인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님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게 악을 행하게 만들기 위한 유혹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하셨고 마귀는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갈릴리 지방을 돌아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마7:29)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고향인 나사렛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회당장이 예수님에게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서서 두루마리 성경을 한 손으로는 말고 한 손으로는 펴면서 이사야서 61장 1절과 58장 6절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은 50년 마다 희년이 됐는데, 희년이 되면 모든 부채가 탕감되었고, 남에게 팔았던 재산이 원 주인이나 후손에게 돌려졌고, 이스라엘 노예들은 자유민으로 해방되었습니다. 희년은 회복의 해였습니다. 희년이 회복의 해였듯이, 성령님이 임하시면 가난하고 눈멀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자유와 구원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령님은 회복의 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두루마리를 말고 앉아서 말씀하셨습니다.(눅4:21)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메시야가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셨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원래 희년이 되면 부채가 탕감되고 재산이 후손에게 돌려지고 노예가 자유민으로 회복되듯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로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귀환하고 나서 메시야가 오시면 가난하고 눈멀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에게 응했다 다시 말해 지금 메시야가 오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을 듣고 놀라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은혜롭고 능력 있었지만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라 자기 마을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고 폄하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가르침을 거부하자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눅4:23) 의사가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자 환자가 당신의 병이나 고치시오 라고 핀잔하듯이 고향 사람들은 지금 메시야가 오셨다고 말씀하시자 예수님에게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잖소 라고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고.’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눅4:24)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관을 가져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우(遇)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그 사람을 너무 잘 알다보면 그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들립니다. 그 사람이 나와 사이가 좋다면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롭게 들리겠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의 단점이 생각나 그의 메시지는 위선자의 메아리로 들립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고후 4:9) 사람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보배처럼 귀중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볼 것이 아니라 보배처럼 귀중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영혼이 삽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사례를 언급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살던 당시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큰 흉년이 들어 수많은 과부들이 굶주렸지만 이방인 지역인 시돈 땅에 사는 사렙다 과부 한 사람만이 밀가루 통에 가루에 떨어지지 않고 올리브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눅4:25-26) 엘리사 선지자가 살던 당시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 한 사람만이 어린아이 피부처럼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눅4:27-28)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받았다고 자신했는데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과격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만 구원받았다는 ‘내가 복음’에 빠져 남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렇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면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생각에 빠진 요나 선지자에게 박 넝쿨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읍을 멸망하시자 않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에게 박 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셨다가 시들게 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뜨겁다고 불평하자 하나님은 네가 하룻밤에 낫다가 말라버린 이 박 넝쿨조차 아꼈는데 하물며 하나님인 내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큰 성읍 니느웨 백성들과 수많은 가축들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도 구원받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착한 사람도 구원받고 악한 사람도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구원 받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지만 아버지는 저 사람도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열차에 동승시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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