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11-19 감사 그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암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671명이 죽었는데, 악성신생물(암)으로 185명(27.6%), 뇌혈관 질환으로 81명(12%), 심장 질환으로 59명(8.8%), 고의적자해(자살)로 34명(5%), 당뇨병으로 31명(4.6%), 운수사고 21명(3.1%)이 죽었습니다. 암은 전체 사망자의 4분의 1이 넘었습니다. 1,000명 중에서 276명이었습니다.
1.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병을 가장 무서워했을까요? 나병을 가장 무서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제사장이 검진하다 보니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하면 입은 옷을 찢어버리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 질렀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에서 쫓겨났고 회당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육체적으로 고통 받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 버림받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소록도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은 암처럼 전염될 확률은 적었으나 에이즈처럼 격리되었습니다.
2.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부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북부인 갈릴리와 중부인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셨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던 나병환자들 10 명이 예수님을 보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습니다.(12-13절)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13절을 통해 나병환자에게 안수 기도도 해주시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수 기도도 해주지 않으셨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개떡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나병환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라.’ 로 이해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찾아갔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23절을 통해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3. 나병환자들은 믿음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걸아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영화 [벤허]에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흘리신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시는 순간 나병이 나았습니다. 벤허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9 명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나병이 나으면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 갔습니다.(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이 나았다고 판정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회당에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9 명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1 명은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제사장의 ‘정하다.’는 선언보다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4. 감사한 사마리아인은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1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간 9 명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의 혼혈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경멸하는 인종이었습니다. 요즘은 국제 결혼하는 가정이 많아 혼혈아들이 많아졌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온갖 차별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도 그랬으니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찾아갔고, 사마리아인은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잊은 유대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17-18절)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이 기특하셨습니다.(19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9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육신의 질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러나 1명의 사마리아인은 말씀을 믿고 육신도 치유되었고 감사를 하여 영혼도 치유 되었습니다. 육신이 치유되면 병이 낫지만 영혼이 치유되면 구원을 받습니다. 9명의 유대인들은 작은 것은 얻었지만 1명의 사마리아인은 큰 것까지 동시에 얻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보는 잡지에 만화 만평이 나왔습니다. 저울이 있는데 기울어져 있더군요. 한쪽의 저울추는 올라갔고 한쪽의 저울추는 내려같더군요. 내려간 쪽에는 ‘간구’라고 쓰여 있었고 올라간 쪽에는 ‘감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간구는 무거워서 내려갔고 감사는 가벼워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아쉬워서 간구는 많이 하지만 평소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저울추는 어떻습니까? 간구와 감사와 균등합니까? 아니면 기울어져 있습니까? 우리의 저울추가 균형을 이루거나 아니면 감사 쪽으로 기울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감사할 일들을 더 많이 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