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3-35 눈이 밝아져 알아보더니

주보에 나와 있는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의 그리스도]라는 그림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죠. 그림을 보면 어둡고 넓은 실내 한가운데에 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림은 자연스럽게 중앙에 집중되네요. 그림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만난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소년이 음식을 나르고 상이 차려지자 나그네는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줍니다. 바로 그때 두 제자는 그 나그네가 예수님인 것을 알아봅니다. 왼쪽에 등을 보인 제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얼굴에 대고 있고, 오른쪽에 있는 제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네요. 소년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예수님을 모르는 것 같네요.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다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고 나서 그린 그림입니다. 인생의 풍파를 겪어서 그런지 그림의 깊이가 깊어졌다는 평가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그림은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그림 그림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글로바(24:18)였고 다른 한 명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두 제자는 슬픈 기색이었습니다.(17) 그것은 두 제자가 ‘선지자’로 여겼고(19),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던(21) 스승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사형 판결을 받고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없이 붙잡혀 가셔서 허무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두 제자는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여 제자들이 무덤에 찾아가 보았는데 시신은 보이지 않고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여 남 제자들이 가보았더니 시신이 보이지 않아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뒤에서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두 제자는 그 사람이 예수님인지는 꿈에도 생가하지 못하고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낸 순례자인가 싶어 가던 길을 동행하였습니다. 지금 두 제자는 스승을 잃고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셨듯이 우리가 힘들어 할 때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정에 불화가 생겨 속상해 하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교회가 부흥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톱뉴스를 듣지 못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18) 두 제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바랐는데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하였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여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다녀서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19-24)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다고 나무라셨습니다.(25)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창3장, 12장, 시22편, 69편, 110편, 사53상, 렘31장, 슥9장, 13장, 말3장)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구원할 ‘영광의 왕’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고 돌아가실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그런지도 모르고 두 제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출세하려고 따라다녔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실망했습니다. 두 제자는 우리처럼 이기적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듯이 우리도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사회적 지위에 걸 맞는 교회는 저 교회야. 저 교회는 포항시장도 다닌다잖아.’, ‘내 사업을 위해서는 저 교회를 다녀야 해. 저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교회는 포항공대 교수들도 다닌다지. 저 교회를 다녀야 내 수준도 덩달아 올라가겠네.’ 그러다 보니 개척교회는 이마트 옆에 있는 구멍가게처럼 사람이 떠나가고 대형교회는 사람이 몰려드는 지도 모릅니다. 두 제자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가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도 기도하고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키기 보다는 부흥된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두 제자가 고난을 외면하고 영광을 추구하였듯이 우리도 밥상을 차리기 보다는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거잖아요.(시126:5-6)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성공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두 제자를 나무라셨듯이 성경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도 나무라십니다.

두 제자는 집에 도착하자 예수님에게 하룻밤 머물다 가시라고 초청하였습니다. 밤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미천한 종을 시켜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하였습니다. 거실에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떡(빵)과 포도주가 놓였습니다. 두 제자는 손님인 예수님을 중앙에 앉히고 양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주인이 식탁을 주관하지만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에게 주도권을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축복기도를 하시고 빵을 떼어주셨습니다. 그제 서야 두 제자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두 제자와 길에서 대화를 나누시고 빵을 떼어주신 분은 길을 가던 나그네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 제자들의 말처럼 정말로 살아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길에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32) 예수님이 집에서 빵을 떼실 때 눈이 밝아졌습니다.(31)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의 전례’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빵을 떼신 것을 ‘성찬의 전례’라고 말하더군요.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었다 네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는 때와 장소는 미사라더군요.(다음카페 성복성당 오늘의 묵상) 미사를 통해 마음이 뜨거워졌고 영안이 열렸다는 거죠. 사실 개신교 예배학자들도 매주 예배시간마다 설교도 하고 성만찬도 하라고 강조합니다.(제임스 화이트, 로버트 웨버) 그러나 개신교의 보수적인 LABC를 보면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이 아니라 식사라네요.(896쪽) 예수님과 식탁에서 교제를 나눌 때 영적인 눈이 떠졌다고 거죠. 어찌됐든 두 제자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고 떡을 떼며 영안이 열렸듯이 우리도 말씀을 들어야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만찬이든 식사든 주님과의 교제를 나눠야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두 제자가 알아보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두 제자는 달라졌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 실망해서 그리고 자신들도 피해를 당할까봐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밤중에 강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3) 두 제자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해 보니 11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집에서 떡을 떼셨다고 말하였습니다.(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두 제자를 바꾸어 놓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예배를 드리면서 만나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고 교제를 통해 만나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두 제자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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