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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메디치 - 검은 베일 속의 백합
장 오리외 지음, 이재형 옮김 / 들녘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메디치가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를 30년간이나 통치했던 여인. 검은 왕비로 불리우며 왕족도 아닌 외국 여인으로서 당해야 했던 온갖 수모와 멸시에 찬 그녀의 일생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주술을 부리고, 신교도들을 학살하고, 프랑스의 왕들을 허수아비처럼 좌지우지 했던 사악한 여인으로 인식되어 온 카트린의 이미지는 근대에 와서야 재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 2세와 결혼하여 남편과 그의 정부인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던 카트린은 앙리 2세가 마상시합 도중 창에 찔려 사망하자 드디어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앞세워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권력을 잡았던 시대는 신교도인 위그노들과 구교도인 카톨릭 세력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치르던 종교 전쟁의 시기였다. 구교도를 대표하는 스페인과 신교도를 대표하는 영국, 독일은 프랑스를 무대로 종교 전쟁을 선동했고, 왕족과 귀족들은 허약한 왕권에 도전하는 내란을 일으키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도대체 이 내란이 끝나기는 하는 건지 진절머리가 날 정도인데 당사자인 카트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런 와중에 권력을 잡은 카트린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들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로 이어지던 발루아 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실천한 정치가로서의 카트린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카트린이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보여주는 이중적인 태도는 오히려 양쪽 모두에게 불만을 가지게 하고 왕권이 허약해지는 허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자식 복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샤를 9세와 앙리 3세, 알랑송, 마르그리트는 혈육 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여 카트린에 대한 연민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카트린의 일생 자체가 프랑스의 한 시대에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개인의 전기라기보다는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처럼 보인다. 에탕프 부인과 디안 드 푸아티에의 대립, 기즈공작과 몽모랑시, 콜리니가 벌이는 권력 다툼,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프랑스 정치 개입, 장차 앙리 4세가 될 앙리 드 나바라의 면면이 어떤 드라마보다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토록 피비린내나는 치열한 시대를 살았던 카트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반대파를 설득하고 조약을 맺으며 황태후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동시대의 프랑스인들은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그녀를 기억하고 외국에서 온 마녀라 비난했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건 바로 '프랑스'였다. 모든 인생을 '프랑스'를 위해 바친 그녀를 생각하면 프랑스인들의 이런 비난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했으며, 자식들에게도 기만당하고 멸시당했던 카트린이었지만 힘든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그녀가 보여준 황태후로서의 위엄과 불굴의 의지는 어떤 정치가보다도 인상적이고 존경스러웠다.
군데군데 어색한 번역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괜찮은 편이다. 제목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아니고 까떼리나 데 메디치도 아닌 카트린 드 메디치라는 것이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카트린'과 '메디치'란 이름이 더 친숙하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