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이곳만은 가보자 - 최성민의 자연주의여행 5 최성민의 자연주의여행 5
최성민 지음 / 김영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책 초반 부분에서는 저자가 직접 체험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후부터는 저자가 실제로 가봤는지도 불분명한 어조로 여행지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여행지에 대한 국가 정보, 간단한 소개, 해당 여행지 상품을 가지고 있는 여행 회사들을 소개하는데만 그치기 때문에 지루하기만 하다. 재미있는 여행 경험담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론리 플래닛처럼 당장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용도가 불분명한 책이다. 책자에 소개된 정보는 대부분이 신문 기사나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정보들이고, 특정 여행사의 상품 위주로만 소개하고 있는데 굳이 찾아서 볼 필요가 있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
고바야시 요리코 외 지음, 최재혁 옮김 / 돌베개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진주귀고리 소녀>로 유명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과 생애를 밝혀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들은 우선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화가라는 인식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베르메르 뿐만 아니라 몇백년전에 활동하던 화가에 대한 정보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루가 길드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베르메르에 대한 흔적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편이다.

풍속화가로서 일상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의 그림에는 일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우유를 따르고, 편지를 읽고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은 베르메르 특유의 섬세한 빛의 효과와 따스한 분위기, 세심하게 배치된 사물들 속에서 신비로움과 영원성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작품들 때문에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화가라는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무역과 상업이 발달했던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왕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 계급이 통치하는 국가였다. 게다가 가톨릭이 아닌 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왕실과 교회의 권위를 높이는 이야기 위주의 서사 회화가 발전했던 프랑스나 스페인과는 달리 시민들의 일상을 담은 풍속화가가 잘 팔릴 수 밖에 없었다. 상업이 발달한 델프트 출신의 베르메르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맞춰 이야기 그림이 아닌 일상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베르메르의 초기작부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서른여점의 작품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약간은 엉성했던 첫 작품부터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들과 특유의 섬세함이 떨어진 말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시대순으로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천재라기 보다는 노력하는 화가로서의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서명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다가 작품의 수가 적어서 희소성이 높은 탓에 베르메르의 그림은 언제나 위작 논쟁과 아트테러리즘에 휩싸여왔다. 네덜란드 최고의 미술평론가들을 속인 사건들과 훔친 베르메르의 그림을 볼모로 한 IRA의 테러 등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히려 베르메르의 작품이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 작가들이 내는 미술 관련 책들은 깊이는 없이 감상적인 경향이 많아서 꺼려졌었는데 이 책은 괜찮은 편이다.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꽤 주관적인 저자의 주장이 종종 강조되는 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트린 드 메디치 - 검은 베일 속의 백합
장 오리외 지음, 이재형 옮김 / 들녘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메디치가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를 30년간이나 통치했던 여인. 검은 왕비로 불리우며 왕족도 아닌 외국 여인으로서 당해야 했던 온갖 수모와 멸시에 찬 그녀의 일생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주술을 부리고, 신교도들을 학살하고, 프랑스의 왕들을 허수아비처럼 좌지우지 했던 사악한 여인으로 인식되어 온 카트린의 이미지는 근대에 와서야 재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 2세와 결혼하여 남편과 그의 정부인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던 카트린은 앙리 2세가 마상시합 도중 창에 찔려 사망하자 드디어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앞세워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권력을 잡았던 시대는 신교도인 위그노들과 구교도인 카톨릭 세력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치르던 종교 전쟁의 시기였다. 구교도를 대표하는 스페인과 신교도를 대표하는 영국, 독일은 프랑스를 무대로 종교 전쟁을 선동했고, 왕족과 귀족들은 허약한 왕권에 도전하는 내란을 일으키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도대체 이 내란이 끝나기는 하는 건지 진절머리가 날 정도인데 당사자인 카트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런 와중에 권력을 잡은 카트린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들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로 이어지던 발루아 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실천한 정치가로서의 카트린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카트린이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보여주는 이중적인 태도는 오히려 양쪽 모두에게 불만을 가지게 하고 왕권이 허약해지는 허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자식 복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샤를 9세와 앙리 3세, 알랑송, 마르그리트는 혈육 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여 카트린에 대한 연민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카트린의 일생 자체가 프랑스의 한 시대에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개인의 전기라기보다는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처럼 보인다. 에탕프 부인과 디안 드 푸아티에의 대립, 기즈공작과 몽모랑시, 콜리니가 벌이는 권력 다툼,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프랑스 정치 개입, 장차 앙리 4세가 될 앙리 드 나바라의 면면이 어떤 드라마보다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토록 피비린내나는 치열한 시대를 살았던 카트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반대파를 설득하고 조약을 맺으며 황태후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동시대의 프랑스인들은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그녀를 기억하고 외국에서 온 마녀라 비난했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건 바로 '프랑스'였다. 모든 인생을 '프랑스'를 위해 바친 그녀를 생각하면 프랑스인들의 이런 비난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했으며, 자식들에게도 기만당하고 멸시당했던 카트린이었지만 힘든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그녀가 보여준 황태후로서의 위엄과 불굴의 의지는 어떤 정치가보다도 인상적이고 존경스러웠다.

군데군데 어색한 번역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괜찮은 편이다. 제목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아니고 까떼리나 데 메디치도 아닌 카트린 드 메디치라는 것이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카트린'과 '메디치'란 이름이 더 친숙하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극일기 -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편역 / 세상을여는창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1912년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에 이어 두번째로 극점을 밟았던 로버트 팔콘 스콧의 일기이다. 저장소를 설치하고, 펭귄과 범고래를 관찰하고, 지질을 탐구하는 탐사 준비 과정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극적인 전개나 흥미진진한 사건은 없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남극 타임즈를 발행하고, 토론하고, 수없이 동상에 걸리면서도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탐사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1911년 11월 1일. 1년여의 준비작업 끝에 스콧의 극점 탐사대가 출발한다. 험난한 크레바스와 사스트루기 지대를 거쳐 겨우 도착한 극점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먼저 다녀간 아문센의 팀이 남긴 흔적이었다. 아문센과 경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콧이지만 '처음'을 빼앗겼다는 실망감을 일기에서 느낄 수 있어 안타까웠다. 게다가 허탈한 마음을 애써 추스리고 귀환길에 오른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잔인하게도 '죽음'이었다. 에반스가 먼저 죽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준 오츠가 죽고, 오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스콧, 윌슨, 보우어가 조난당하면서 결국 스콧의 남극점 탐사대 전원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1912년 3월 29일을 마지막으로 스콧의 남극 일기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만다.

수색팀이 발견한 스콧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잊혀질 뻔했던 이들의 비극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극점을 처음 밟지도 못했고, 무사히 살아돌아오지도 못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고귀한 희생 정신은 아문센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히려 북극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흘리고, 남극점을 밟을 때도 탐사보다는 극점 정복에만 초점을 맞춘 아문센 팀을 평가절하할 정도로 스콧의 영국팀은 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하지만 스콧의 모국이 영국이 아닌 다른 약소 국가였어도 이들이 이토록 신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스콧 팀이 보여준 용기와 탐사 노력이 헛되다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준비를 거쳐 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이 오히려 비난을 받는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신화 뒤에는 대영제국이라 부를 정도의 힘과 세력을 떨치던 영국인들이 남극점 정복을 노르웨이에 빼앗긴 시기심이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희망을 이야기하던 스콧의 일기는 에반스가 죽고 오츠마저 심각한 상황에 이른 뒤부터는 간절한 기도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지옥과 같은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기를,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기를 기도하던 그들이 결국 눈보라에 갇혀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 순간은 시대를 뛰어넘어 숙연하게 다가온다. 그토록 열악한 장비로 미지의 대륙 남극에서 연료가 새어나가는 줄도 모르고 극점 정복과 탐사 작업을 벌였던 이들의 영혼은 지금도 남극 대륙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1등이 중요하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해왔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14kg에 이르는 지질 탐사 표본을 버리지 않았던 영원한 2등 스콧팀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등수가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임을 로버트 팔콘 스콧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1 - 충격과 공포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
김태권 지음 / 길찾기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이 성지를 순례하는 서유럽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탄압하자 성지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성전이었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교과서를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우리가 공교육에서 배웠던 역사가 얼마나 서구 편향적인지를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책은 전체 6권 완간을 목표로 나온 첫번째 권으로 십자군이 결성된 배경과 1차 십자군의 초반부를 만화로 다루고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는 군소 국가와 영주들이 할거하고, 동으로는 비잔틴제국이 명맥을 이어가고, 중동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게 된다. 종교가 다른 이슬람 세력이 성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교황권 강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자기네들끼리 싸우느라 바쁜 서유럽 군소 영주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자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전쟁을 주창하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성 베드로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은자 피에르를 내세워 이교도와의 전쟁은 죄가 아니고, 이슬람 세력을 악마라며 서유럽인들을 부추긴 교회의 작전이 성공하여 마침내 1차 십자군이 결성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1권은 1차 십자군 중 은자 피에르가 이끌었던 군중 십자군의 만행을 추적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그들은 애꿎게도 독일의 마인츠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하는가 하면 헝가리의 베오그라드와 비잔틴 제국의 니시에서 온갖 약탈을 일삼는다. 잘못된 종교적 열정으로 일어난 힘없는 약자였던 농민들이 무지로 인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도착하는 도시마다 여기가 예루살렘이냐고 묻는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제목은 '십자군 이야기'라고 달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옛날 옛적에 일어난 전쟁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자는 그 역사를 되풀이해서 살아야 한다'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9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전쟁은 우리가 더욱 치열하게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