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일기 -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편역 / 세상을여는창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1912년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에 이어 두번째로 극점을 밟았던 로버트 팔콘 스콧의 일기이다. 저장소를 설치하고, 펭귄과 범고래를 관찰하고, 지질을 탐구하는 탐사 준비 과정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극적인 전개나 흥미진진한 사건은 없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남극 타임즈를 발행하고, 토론하고, 수없이 동상에 걸리면서도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탐사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1911년 11월 1일. 1년여의 준비작업 끝에 스콧의 극점 탐사대가 출발한다. 험난한 크레바스와 사스트루기 지대를 거쳐 겨우 도착한 극점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먼저 다녀간 아문센의 팀이 남긴 흔적이었다. 아문센과 경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콧이지만 '처음'을 빼앗겼다는 실망감을 일기에서 느낄 수 있어 안타까웠다. 게다가 허탈한 마음을 애써 추스리고 귀환길에 오른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잔인하게도 '죽음'이었다. 에반스가 먼저 죽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준 오츠가 죽고, 오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스콧, 윌슨, 보우어가 조난당하면서 결국 스콧의 남극점 탐사대 전원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1912년 3월 29일을 마지막으로 스콧의 남극 일기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만다.

수색팀이 발견한 스콧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잊혀질 뻔했던 이들의 비극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극점을 처음 밟지도 못했고, 무사히 살아돌아오지도 못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고귀한 희생 정신은 아문센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히려 북극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흘리고, 남극점을 밟을 때도 탐사보다는 극점 정복에만 초점을 맞춘 아문센 팀을 평가절하할 정도로 스콧의 영국팀은 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하지만 스콧의 모국이 영국이 아닌 다른 약소 국가였어도 이들이 이토록 신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스콧 팀이 보여준 용기와 탐사 노력이 헛되다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준비를 거쳐 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이 오히려 비난을 받는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신화 뒤에는 대영제국이라 부를 정도의 힘과 세력을 떨치던 영국인들이 남극점 정복을 노르웨이에 빼앗긴 시기심이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희망을 이야기하던 스콧의 일기는 에반스가 죽고 오츠마저 심각한 상황에 이른 뒤부터는 간절한 기도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지옥과 같은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기를,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기를 기도하던 그들이 결국 눈보라에 갇혀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 순간은 시대를 뛰어넘어 숙연하게 다가온다. 그토록 열악한 장비로 미지의 대륙 남극에서 연료가 새어나가는 줄도 모르고 극점 정복과 탐사 작업을 벌였던 이들의 영혼은 지금도 남극 대륙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1등이 중요하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해왔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14kg에 이르는 지질 탐사 표본을 버리지 않았던 영원한 2등 스콧팀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등수가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임을 로버트 팔콘 스콧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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