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원론 - 옛이야기로 보는 진짜 스토리의 코드 대우휴먼사이언스 20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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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를 접하다보면 문득 이런 차이를 느낀다. 보는 동안엔 재미있었는데 다 보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듯한 허망한 이야기, 또 하나는 별 생각없이 봤는데 계속해서 곱씹어보게 되고, 무언가 울림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눈만 돌리면 모든 곳에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 마음을 울리는 진짜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걸까? 
저자 손동흔은 스토리텔링의 진짜 힘은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구비문학, 신화, 설화 등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의 원형에 있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온 이야기는 힘이 세다.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지는 인스턴트식 이야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웹툰 작가 주호민은 저자 신동흔의 책 <살아있는 한국신화>를 보고 <신과 함께>에 대한 창작 영감을 받았다고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책의 뒤를 이은 이 책 <스토리텔링 원론>은 다양한 구비문학들을 살펴보고 실제로 분석해보는 과정을 통해 오랫동안 살아남는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를 가져와 스토리텔링 구조를 쪼개서 분석해보는 방식의 진행이 자칫 학창시절의 국어시간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나름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나 그리스 신화, 혹은 동네별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설화등을 보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황당한 경우가 많다. 이런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걸까 의아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오랜 세월에 걸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들의 힘은 어디에 있는건지 저자는 하나하나 분석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야기를 분석하면 그 이야기가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게 꽤 짜릿한 경험이다. 

「옛날 제주 바다 수평선 너머에 영등할망이 살았다. 어느 날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들은 거센 풍랑을 만나 외눈박이 거인들의 나라에 이르렀다. 이마 한가운데 커다란 눈이 달린 무서운 괴물이었다. 이를 본 영등할망은 어부들을 구하러 나섰다. 배를 몰래 숨겨서 제주 섬으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제주 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어부들은 잠깐 경계심을 풀었다가 삽시간에 외눈박이가 있는 곳으로 휩쓸려 떠내려갔다. 어부들이 살려달라고 외치자 영등할망이 나타나 온힘을 다해서 이들을 고향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무사하지 못했다. 할망은 외눈박이에 의해 산산이 찢겨서 죽고 말았다. 그 후로 사람들은 영등할망을 위하려 제를 지내게 되었으니 바로 영등굿이다.」 
<스토리텔링 원론 p.22>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처음엔 이게 무슨 만화같은 헛소리야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근데 가만히 분석해보니 바다 한가운데 나타난 커다란 눈이 달린 무서운 괴물은 다름아닌 태풍의 표상이다. 거인에게 달려있는 커다란 눈은 태풍의 눈인 것이다. 영등할망은 바다를 떠다니는 바람으로, 어부들이 탄 매를 밀어주고, 고기를 몰아오기도 하는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분석해놓고 보니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흥미로운 스토리로 만들어졌기에 오랜시간 사람들 사이에 구비되어 전승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이야기는 마음가는대로 만들어진 허황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원형적 사상과 허튼 망상을 어떻게 분간하여 걸러낼 것인가 하는 점인데,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구비전승 과정에서 망상적 담화는 자연스럽게 도태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본원적 인지에 맞지 않으므로 내면에 기억되어 새겨지는 대신 잠깐 스쳐서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서 전승해온 설화들은 이러한 인지적 필터를 거쳐 살아남은 것들이다. 그 속에 인간의 정신적 구조와 지향성이 원형적으로 함축돼 있음을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 스토리텔링 원론 p. 70>

많은 스토리텔링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중 저자를 가장 열받게 한 사례는 아마도 한때 엄청난 유행을 불러일으켰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였던 것 같다. 설화의 내용을 소설적 디테일로, 그것도 음산하고 엽기적이며 폭력적인 디테일로 덮어씌운 경우라고 한다. 이 책은 당시 19금 동화로 널리 알려져 더 호기심을 자아내고 많이 읽혔던 책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아름다운 동화책이 사실은 엄청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야한 이야기라는 설정. 물론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이들 동화처럼 밝고 순수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원래 이야기에는 동화보다는 좀 더 현실을 반영한 잔인함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원래 스토리텔링의 본질을 흐리는 소설적 디테일을 구겨넣어 본래의 스토리텔링이 주려했던 메시지를 완전히 망가뜨린 사례라고 한다. 그 외에도 <어거스트 러쉬>나 <신과 함께>의 스토리텔링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새롭고 흥미로웠고, 저자가 추천하는 그 외의 작품들도 궁금해졌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참 존경스럽다. 거기다 그 안에서 뜨거운 울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정말 신기하기까지 하다. 좋은 스토리텔링이란 단지 재미있는 이야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뜻이 찾아지고, 역사와 철학이 빛나며,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이 원형적으로 녹아들어 있어 시공간과 집단의 경계를 넘어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바로 진짜 스토리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짜 스토리는 무엇일까, 찾아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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