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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세븐틴
최형아 지음 / 새움 / 2018년 2월
평점 :
「“자기 안의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뭔 줄 아세요? 그것을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말을 못하겠어요. 내 잘못이 아닌데, 그게 내 나머지 인생을 모두 망쳐버렸다고 아무한테도 털어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굿바이, 세븐틴>
그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폭행 당한 여성들은 피해자임에도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평생 아픔을 숨긴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정작 가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친구들 사이에서 무용담처럼 떠벌리며 아무렇지 않게 사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회가 요즘 미투 운동으로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다. 더 이상은 피해 여성들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지 않는다. 다른 범죄들과 달리 성폭행 사건은 범인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항상 피해자가 불리한 경우가 많다. 여지를 줘서 당한 거라나 뭐라나. 하지만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면서 #metoo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그동안 이렇게도 숨은 사건들이 많았나 싶을 만큼, 각종 정치계, 연예계의 성폭행 가해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당하고도 어쩔 수 없이 입 다물고 있었던 피해자들이 그만큼 많았던 셈이다. 오늘자 뉴스에는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남자들이 불똥 튈까 무서워 회사 내 여성들과 아예 대화도, 식사도 거부하는 '펜스룰'(Pence rule) 현상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이상한 방식의 역차별인 것 같긴 하지만(떳떳하다면 왜 피하는 건지), 어쨌든 이런 문제들이 공론화 됨으로써 공공연한 성추행들이 앞으로는 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런 시점에서 읽은 <굿바이, 세븐틴>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주인공 윤영은 잘 나가는 여성전문 성형외과 의사이다. 능력 있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여자다. 그녀는 친구 닥터 안과 함께 동업으로 운영하는 병원에서 여성의 음부 성형을 담당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 외에도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예쁘게 성형해 남자의 사랑을 쟁취하려 한다. 그런 여자들을 하루에도 여러 번 상대하는 윤영은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내세워 친절한 미소로 상담해주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짓는다. 윤영은 17살 때 비 오는 날 밤 야자를 끝내고 집에 가던 길에 옆 학교의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쓰러져 있는 자신을 앞에 두고 마치 사람이 아닌 양 서로 먼저 하겠다고 투닥 거리며 욕을 내뱉던 그 남학생들의 대화와 목소리를 윤영은 20여 년이 지나도록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윤영의 가족은 도망치듯 그 도시를 떠나 서울로 이사 와서 살았다. 마치 그곳에서 벗어나면 그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공부를 잘했던 윤영은 그 일로 마음의 병이 생겨 학교도 중간에 그만두게 되지만, 얼마 후에는 부모님을 더 이상 걱정 시키지 않기 위해 검정고시를 공부하고 2년 만에 의대에 진학한다. 결론적으로는 전문직도 얻고, 멀쩡히 살고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지만, 윤영은 그 이후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무 남자와 성관계를 하고, 남자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관계를 갑작스럽게 끝내버린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남자들에게 가하는 일종의 벌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몸을 일부러 학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걸로도 부족할 땐 일부러 몸이 고통스럽도록 곳곳에 문신을 한다. 그래서 그녀의 몸엔 날개를 펼친 나비가 여기저기서 날아오를 듯한 기세로 새겨져 있다. 그걸 빼면 윤영은 아주 정상적인 가면을 쓰고, 차가운 얼굴로 사회생활을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환자 심희진은 왠지 윤영을 불편하게 한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 환자와 의사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을 많이 하고, 자주 찾아와 이상한 말을 털어놓던 그녀. 그런 그녀가 병원에서 성형 후 어느 날 불현듯 자살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윤영은 그때야 희진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며 뭔가 이상하고도 익숙한 느낌을 깨닫는다. 희진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와 맞닿아있는 듯했던 것이다. 그렇게 윤영은 자신과 심희진의 관계, 또 희진이 겪었던 아픔을 알아가면서 자신이 애써 숨겨 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 나아간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그것을 견디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고작 그것은 처음부터 소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버리는 거라니, 마음이 아팠다. 가장 소중한 것이었어야 할 자신의 몸이 누군가로 인해 악몽으로 뒤덮인다면, 어쩌면 살기 위해 정신적으로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원래 소중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그건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다. 성폭행 범죄의 가장 나쁜 점이 피해자가 모든 정신적, 물리적, 사회적 피해를 모두 덮어쓴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서 오히려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협박 받기도 한다. 어떻게 성폭행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더러울 수 있는가.
아픈 사건일수록 어쩌면 더 양지로 끌어내서 정면으로 맞서야 되는지 모른다. 그래야 진정으로 어두운 기억과 깔끔한 굿바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들의 진정한 굿바이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