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떠나올 때 우리가 원했던 것
정은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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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엔 정해진 방식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거웠으면 된거다. 최근들어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꼭 가고싶다기 보다는 의무적으로 가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다. 다들 가니까 나도 그 핫한 장소에 가서 인증샷 정도는 남겨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행을 가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게 싫어졌다. 심지어 유럽으로 떠나기로 한 신혼 여행도 계획없이 방치된 상태인데, 과연 실제로 떠날 수 있을지 조차 의문스럽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갔던 좋은 여행지를 검색해 그 여행을 따라가기 위한 계획을 세우겠지. 어디서 찍으면 사진이 예쁘다더라, 여기가면 맛있다더라. 
그동안 그렇게 다녀왔던 여행은 처음 가는 장소임에도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넘 많이 돌린터라 그 장소에 도착하면 이미 몇 번쯤 왔던 장소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여기구나, 신기한 기분이 들지언정 그 경험이 진정 신선하거나 새롭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엔 아무런 계획없는 여행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완전 무계획으로 유럽여행 떠나볼까?" 
"그러자. 그런 여행이 진짜 여행이야." 
짝꿍씨는 속 편하게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에효, 그나저나 이 남자를 믿고 진짜 유럽으로 떠나도 괜찮으려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은 저자 정은우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사진, 떠오른 생각들을 담은 여행 에세이다. 특이한 건 여행지에서 만년필로 그린 풍경그림들이 책 곳곳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빠르게 찍고 이동할 수 있는 사진과 달리, 그림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는 느린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것, 현실을 벗어나 낯선 장소에 와 있는 사실 자체를 오롯이 즐기는 것, 그것이 그가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그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해끔한 햇살 아래를 걷고 싶은 만큼 걸었고
걸었던 만큼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평서문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도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고,
충분히 만족스럽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p.51>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고, 돌아오고, 만족감을 얻는 것, 그것만큼 사치스러운 여행이 있을까? 여행을 떠나면 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이 보고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 때문에 오히려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졌다. 즐거우려고 떠나는 여행이 일처럼 느껴졌다. 

「삶이 너절할수록 간절해지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하고 싶다는 바람도 한 꺼풀 벗겨보면 웃고 싶은 마음에 다름 없을 것이다.」 <p.84>

그렇다. 사실 여행을 떠나는 건 웃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잠시 현실을 내려놓고 걱정따위 없는 사람 처럼 마음껏 웃고 싶기 때문이다.


「할 일을 빼곡하게 적힌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뭔가를 보고 남겨야 하는 여행과는 무관한 빈둥거림을 우리는 원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빈둥거림이었고, 일종의 허송세월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좋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러고싶었다. 자극적인 행복은 없었지만 그곳은 내게 꼭 맞는 옷 같았다. 」 <p.72>

여행지에서 꼭 강박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들을 필요는 없다고, 그냥 여기서 행복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러고보면 여행가서 싸우는 친구나 커플을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짝꿍씨랑 여행 갔을 때, 난 하나라도 더 봐야 하는데 길가에 꽃 하나, 벌레 한마리 까지 관심을 가지느라 도저히 앞으로 갈 생각이 없는 짝꿍씨를 보면서 어찌나 속이 터졌던지, 소리를 꽥꽥 지르며 싸웠던 기억이 난다. 난 무엇이 그리 보고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음 급해 했었을까.


「나는 여행 중에 딱히 쓰고 싶은 말이 없는 날, 특별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날에 더 악착같이 쓴다.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유서깊은 박물관쯤은 가줘야 여행이라고 여기는 선입견을 깨는 나만의 방식이다. 별스럽지 않은 것들, 사소한 것들을 기록하다보면 앞으로 이렇게 소소하게 쓰고 그리면서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작은 순간을 멋지게 도려내 잊을 수 없는 글로 남겨두는 것. 그 과정을 통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사소한 긍정과 자신에 대한 상냥한 체념을 배운 덕분이다. 」 <p.170>

여행을 가면 열심히 사진은 찍어댔지만,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글로 남겨놓으려는 생각은 안해본 것 같다. '돌아가서 언젠가 정리해야지' 하지만, 몇 일만 지나도 그 때의 그 감성은 다 사라지고 난 뒤다. 낯선 곳에 있는 짜릿한 그 순간, 꼭 근사하고 멋진 장소가 아니더라도 행복한 그 순간을 한 토막의 글로 남겨두는 것, 어설픈 그림으로 천천히 그려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진짜 사치스럽고 멋진 여행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여행갈 일이 설렌다. 일처럼 생각되던 계획 짜는 일이 조금은 재미있어 질 것 같다. 
다른 건 필요없다. 
많이 웃고 오자.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오자.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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