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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평점 :
시집을 심심치 않게 구매하곤 하지만, 시는 아직도 나에게 어렵기만한 영역이다. 어떻게 읽어야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같은 요런 쿡 찌르는 제목은 안읽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구나 죽도록 인생이 싫은 날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사르 바예호 의 이번 시선집은 오래전에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적이 있지만, 절판되고 나서 입소문 만으로 중고책 가격이 10만원을 호가할만큼 구하기 어려웠던 책이라고 한다. 첫번째 시선집이 나왔을 당시는 IMF쯤이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제목으로 선정되었다는데, 이번에 나온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은 요즘 사람들의 속터지는 마음의 병을 대변한 제목일까? 제목만 봐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 하다. 반전은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시에도 희망적인 얘기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궁금한 분은 직접 읽어보시길ㅋ 어쨋듯 이번 시선집에는 예전 시선집에 있던 시에서 번역되지 않았던 시까지 추가로 더해서 더욱 풍성하게 나왔다고 하니 뭔지 몰라도 일단 소장각임은 분명한 듯 하다.
세사르 바예호 는 중남미의 유명한 시인 네루다와 비견될 만큼 유명한 시인이지만, 아시아 쪽에서는 번역된 적이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시인이다. 아시아 중에서는 그 당시 한국어가 최초의 번역이었다고 하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다. 책에는 「검은전령」, 「트릴세」, 「인간의 노래」,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시집에 들어있는 시편들과 나머지 시들을 두루 모아 담았기에 시집치고 책도 꽤 두툼한 편이다.
살다보면 겪는 고통. 너무도 힘든 … 모르겠어.
신의 증오가 빚은 듯한 고통. 그 앞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괴로움이
썰물처럼 영혼에 고이는 듯 … 모르겠어
…중략
영혼의 구세주가 거꾸러지며 넘어지는 것.
운명의 신이 저주하는 어떤 믿음이 넘어지는 것.
이 처절한 고통은 그리도 기다리던 빵이
오븐 문 앞에서 타버릴 때 나는 소리.
< 검은 전령 중 발췌 p.22>
살다보면 뒤통수를 치듯 아찔한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시를 읽으니 어떤 믿음이 거꾸러지며 넘어지는 듯한 눈앞 캄캄한 충격을 받았던 상황이 떠오른다. 아무 생각도 안나고, 마냥 멍했던 시간들이었다. 시인이 말줄임표와 함께 '모르겠어' 라고 표현했을 만큼 뭐라 말이 안나오던 그런 상황들을 떠올리며 '그래 그랬지' 하며 읽어나갔다. 세사르 바예호는 종교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자신의 거듭된 불행에 슬퍼하며 신이 자신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며 무신론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은 이야기>라는 시에서 '나는 신이 아픈날 태어났다'며 시를 썼을까. 신이 잠시 딴데 정신을 판 사이에 자신의 삶이 진행되고 있다고 느낀걸까. 그만큼 시인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형! 오늘 난 툇마루에 앉아있어.
형이 여기 없으니까 너무 그리워.
이맘때면 장난을 쳤던 게 생각나. 엄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지. "아이구, 얘들아…"
저녁 기도 전이면
늘 술래잡기를 했듯
지금은 내가 숨을 차례야. 형이 나를 찾지 못해야 하는데,
마루, 현관, 통로.
그 다음에는 형이 숨고, 나는 형을 찾지 못해야 해. 그 술래잡기에서 우리가
울었던 게 생각이 나
…중략
형! 너무 늦게까지 숨어 있으면 안 돼.
알았지? 엄마가 걱정하실 수 있잖아.
<나의 형 미겔에게 발췌 p.95>
세사르 바예호는 어릴적 형을 잃고 누나를 읽고 어머니를 잃고 평생을 슬픔과 외로움속에 살아간 인물이다. 어릴적 추억을 끝없이 되새기며 형에게 보내는 시는 어린아이의 언어라 더 슬프다. 형이랑 같이 술래잡기를 하고 싶은데 형이 없다. 얼마나 허전하고 슬플까. 어릴적 기억이 떠올랐다. TV를 보다가 당연히 뒤에 동생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동생한테 말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디 가고 없는 날이었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늘 옆에 있다고 생각했었다니,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에게 놀란 기억이 있었다. 그때가 생각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파리에서 죽겠다.
그날이 어느 날인가는 이미 알고 있다.
파리에서 죽으리라. 피하지는 않겠다.
어쩌면 오늘 같은 가을날 목요일일 거다.
오늘 같은 목요일일거다. 이 시를 쓰는
이 목요일, 상박골이 아파오고 있는데,
내가 걸어온 이 길에서 오늘만큼 내가
혼자라는 것을 느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흰 돌 위의 검은 돌 p. 200>
세사르 바예호 는 항상 외로웠고, 삶보다 죽음을 가깝게 생각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목요일에 죽겠다는 시처럼 시인은 실제로 목요일에 정신을 잃었고, 그 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고향인 페루에서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혔다가 결국엔 파리에서 외롭게 죽어간 시인. 그의 절망과 슬픔에 찬 시들을 보면 인생이 아무리 싫은 날이라도 어느정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인간은 나같은 절망을 겪는 사람에게서 더 큰 위안을 얻는 법이니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은 어느 날 기분이 정말 거지 같을 때 나와 같은 절망을 겪었던 사람을 느끼고 싶을 때 찬찬히 읽으며 위로를 얻으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시는 전체적으로 난해하기도 하고 어려운 시도 많다. 전문가들도 아직까지 이 시에 대해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며 분석할 거리가 많다고 할 만큼 쉽지 않긴 하지만, 적어도 읽다보면 내 마음을 긁어주는 시구는 발견하기 마련이다. 좋은 시는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아주 인생이 싫은 어느 날 한 조각씩 꺼내먹으면 어떨까. 절망적인 시는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