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 짓기
정재민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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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은 두가지 종류의 실로 돼있데. 가운데를 향하는 직선의 실과 그 똑바른 실들을 연결하는 둥근 실. 똑바른 실을 방사실이라 부르고, 원형의 실을 나선실이라 불러." < p.371>


우리집 앞 계단 복도 창문에서 거미 한마리가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벌써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거미줄 사이로 벌레 몇마리가 잡혀 거미에게 잡혀먹은 듯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빈집도 아닌 곳에서 거미가 이렇게 열심히 거미집을 짓고 있다니, 덕분에 나는 바로 앞에서 실시간으로 거미가 엉덩이에서 실을 뽑아내며 왔다갔다 거미집의 윤곽을 완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앙에서 바깥으로 방사형으로 왔다 갔다 이어준 다음, 그 줄을 뱅글뱅글 돌면서 그물처럼 이어준다. 소설이 거미집 짓기 와 같다더니, 이 소설 과연 그러네. 무방비 상태로 책을 읽다가 점점 작가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책을 덮었다. 
이 작가 대단하군. 책을 읽고나서 작가 소개를 다시 찾아봤다. 정재민 이라는 신인작가였고, 공과대 출신 작가였다.  꼬박 4년을 들여 이 소설을 완성했단다. 난 이 소설이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며 팽팽하게 이어가다, 마지막엔 정신이 얼얼하도록 뒷통수를 때리는 책이다. 책을 읽는동안 빼두었던 책의 띠지를 보면서 비로소 그말에 공감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더니 정말 그렇다. 

거미집 짓기 는 1963 년 도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와 2012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차례로 교차되며 진행된다.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두개의 이야기기가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겹쳐지기 시작하고 거미의 나선실처럼 꼼꼼하고 팽팽하게 이어진다. 2012년, 소설가 이재영은 박물관에서 우연히 얼굴에 화상 입은 남자를 보고 인간적인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잠시 인터뷰를 하자고 말을 걸어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하다 어떤 부분인지 모를 부분에서 남자는 흥분하여 소설가의 멱살을 잡고 테이블에 내다 꽂아버린다. 이유없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소설가는 호기심 반, 분노 반으로 남자가 사회복지사 라는 정보만 가지고,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라는 의문을 품으며 서울의 복지관들을 뒤져가며 남자의 정체를 찾고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 

1963년의 탄광촌에는 서희연이라는 탄광촌에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예쁜 여자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며, 어머니는 왠일인지 바깥출입 하는 것을 두려워해 딸인 희연이 시장보는거 부터 새벽에 나가 물떠오는 것까지 많은 일을 한다. 집들은 따닥따닥 붙어 여섯집이 한지붕을 썼고, 다른 집과의 경계가 나무판자 하나여서 옆집에서 하는 말이 다 들릴정도로 가족의 사생활이 없는 공동체 생활이었다. 아빠는 술 먹으면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희연은 그런 아빠가 싫었다. 

이런 전혀 다른 시간적 배경으로 시작해서 2012년의 소설가는 화상입은 남자의 이름은 '정인' 이며, 봉천동의 한 복지관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자원봉사자로 지원해 그 남자에 대해 캐내기 시작하고, 63년도의 희연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성인이 된다. 똑같이 시간이 흐르는 만큼 소설 중반이 넘어가면 이 두 시대의 인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소설 속 인물이 품었던 욕망과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 아주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얘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생각들이 심도있게 묘사되는데, 그런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특히 좋았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숨겨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섬뜩한 생각, 그런 무섭고 깊은 심리들을 은근하게 잘 풀어놓은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다. 


"거미가 집을 지을 때 맨 처음 하는 일이 튼튼한 곳을 골라 직선으로 연결하는 거야, 작가와 독자 모두 인정할 수 있는 튼튼한 사실들. 사실이 아니라도 좋아. 공감할 수 있는 감정들. 작가는 마음에 드는 재목들을 모으지만, 자신도 왜 거기에 끌리는지 알 수는 없어. 거미가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을 서로 연결해나가는 거야. 그런데 무엇이 관계 없는 것들을 끈끈이 옭아맬까? ... 줄이 탄탄해지는 장력은 어디서 나올까?.... 사람들이 거미집을 볼때면 줄을 보는 것 같지만, 동시에 줄과 줄이 만드는 공간도 보는거야. 바로 그 빈공간을 채우는 것이...." 
<p.372>



소설 속 인물 영훈이 '거미' 라고 부르는 소설가 여자가 나온다. 소설을 쓰는 것은 거미집 짓는 것과 같다는 말은 그 여자가 하는데, 아마도 정재민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소설이란 것이 뭘까 하는 고민을 거미라는 여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에 녹여 담아낸 것 같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 이재영은 소설을 더 잘 쓰고 싶어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고,  그 속에 숨은 동기나 욕망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방법이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만큼 소설이 인간의 숨은 욕망을 건드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에 대해 말할 시간이다. 그러려면 몇 걸음 앞에 있는 상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 
잃은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길을 가다 구덩이에 발이 빠지는 순간은 예상할 수 없이 찾아온다. 아픈 곳을 문지르며 몇 걸음 걸어 나간다. 옷을 털고 돌아보니 구덩이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이제 벗어났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뒤돌아 걸음을 내딛는다. 슬픔은 그렇게 시작된다. 
< 거미집 짓기 p.459>



사람이 사람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인간이지만 내가 겪지 못한 무언가를 겪은 인간을 정말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소설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소망하며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생에서 우연히 맞딱뜨리는 내 속의 섬뜩한 감정, 그것을 낯선 자가 쓴 소설에서 발견하면 무서우면서도 반갑다. 그래서 소설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거미집 집기라고 했던가. 길을 가다 거미줄에 걸리면 벌레 뿐 아니라 거미보다 몇 백배는 큰 인간도 당황하며 허우적 거린다. 그 끈적하게 달라붙는 거미줄의 느낌은 내가 소설에서 숨어있던 익숙한 감정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요, 잘 만들어진 거미줄을 보며 느끼는 놀라움은 그 치밀한 얼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들이 다 맞아떨어진 소설 같아서 나는 이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정재민 작가가 얼른 다음 소설을 또 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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