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맨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3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난 보이스피싱을 당해봐서 안다. 그들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긴장감을 조성하고, 사람의 신뢰감을 얻어서 유유히 돈을 뜯어내는지. 몇년 전 집에서 막 나와서 친구랑 어디 가려던 길,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순간 어느 경찰서의 누구라고 얘기하면서 ㅇㅇㅇ씨를 아시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그 자들이 내 통장 명의를 도용해 범죄에 이용했다며 내가 범죄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면 어느 은행에 통장이 몇 개가 있고, 그 통장 안에 잔고가 얼마나 들어있는지 밝히라고 했다. 진짜 경찰관 같은 목소리와 특유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순진했던 나는 한 시간에 걸쳐 설득을 당하고 내 통장 잔고 정보를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당장 컴퓨터를 켜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남겨야 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말하는 어느 사이트에 접속하란다. 접속해서 자기들이 시키는대로만 누르고 순서대로 실행하란다. 범죄 내용에 관한 법 조문 같은것을 확인하게 해서 혼을 빼놓고는, 은행 계좌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게 하고, 다음페이지로 넘어갔더니..잉? 보안카드 번호를 다 적으라고? 그 때부터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내가 당한건가 하며 머릿속이 흔들리는 거 같아 고민하다가 그냥 안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앞으로 2주동안 모든 금융거래가 정지될 것이고, 경찰서에 직접 와서 경위서를 적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금융거래가 정지되는 일따위는 없었다. 사이트를 자세히 훑어봤더니 경찰청 사이트를 똑같이 따라 만든 피싱사이트였다. 하아, 내가 보이스피싱에 당할 뻔 하다니!! 분하면서도 세상이 무서웠다. 


그리고 나서 몇달 뒤, 어느 한 기자가 "기자도 당할뻔 한 보이스피싱"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당한 똑같은 수법으로 보이스피싱 당한 얘기를 글로 쓴 기사를 봤다. 그래, 내가 바보 같아서 당한게 아니었어! 난 괜찮은 보이스피싱 기법의 초기 피해자였다. 당시 내 통장에는 돈도 100여만원 밖에 없었는데, 벼룩의 간을 빼먹지 그걸 빼앗아 보겠다고 한시간 넘게 씨름한 그들도 대단하다. 그렇게 난 다행히 비싼 수업료 없이 실제 보이스피싱을 경험했다. 


소설 <립맨>은 보이스 피싱으로 시작해서 유괴 사업으로 판을 벌린 범인들과 경찰들의 한판 승부를 담은 범죄 소설이다.  무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벽돌책에 경찰과 범인의 머리 싸움이 숨가쁘게 빼곡히 담겨있다. 범죄 소설이라 하면 무릇 경찰의 입장에서 범죄집단인 악의 무리를 처단하길 바라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기 마련이지만, 이 소설은 참 아이러니 하게도 누굴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친숙한 범인들과 경찰의 의무를 다하는 바른 경찰, 아들을 유괴당한 대기업 사장마저도 너무 바르고 착한 사람이다. 범죄소설에 이렇게 착한 사람만 나와도 되는건가, 그것도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보이스피싱과 유괴사업에 관한 범죄소설인데 말이다. 


모두가 선하지만 모두가 서로의 적이다. 누가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이용해 절묘하게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낸 시즈쿠이 슈스케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 소설의 전편으로 '범인에게 고한다' 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래서 립맨의 또다른 이름은 <범인에게 고한다 2>라 할 수 있다. 범인에게 고한다에서의 범죄 이야기가 립맨에서도 암시되어 이야기 되고 있고, 시간상 배경도 전편의 사건 후에 일어난 일로 소설이 전개되긴 하지만 범인에게 고한다를 안읽은 사람도 <립맨>을 읽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립맨의 범죄자 도모키와 다케하루 형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20대 청년들이다. 몇 년 전 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슬픔에 빠졌었지만 형 도모키는 공부도 잘하고 건실한 청년이라 열심히 취업준비를 해서 건실한 과자회사 미나토당에 일찌감치 취업이 확정되어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나토당이 과자 유통기한 조작사건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회사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 위기에 처하자 이미 취업이 예정 되어있던 신입사원들을 협박해 거의 강제로 취업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런 과정에서 도모키는 예정되어 있던 회사취업도 날아가고, 이후 다른 곳에 취업하지도 못해서 중간에 붕 뜨게 된다. 하루하루 먹고 살일이 점점 막막해지며 앞날이 걱정되던 어느 날, 도모키는 동생 다케하루와 함께 우연히 보이스피싱에 발을 들이게 된다. 


소설 립맨 초반에는 보이스피싱 일당들이 어떤식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빼놓고 돈을 뺏어가는지 아주 흥미롭고 상세하게 나온다. 정말 이건 안 속을 수가 없겠다 싶을 만큼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하게 속여서 신속하게 전화통화 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실행팀, 수령팀이 나누어져 있고, 한탕씩 성공할 때마다 보수도 회사 급여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두둑하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에 꼬리가 밟히면서 보이스피싱 일당들이 싹 다 잡혀가버리고 도모키와 다케하루 형제는 아슬아슬하게 가까스로 도망쳐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형제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동안 보이스 피싱으로 번 돈 만으로는 앞으로의 인생이 바뀔 것 같지가 않다. 바bar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를 고민하던 도모키는 자신과 같이 학교를 다니던 (그때 당시에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떨어지던) 대학 동창들이 바에 와서 술을 마시며 은근슬쩍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느낀다. 큰 돈만 있다면 남부럽지 않게 사업이나 하면서 살고 싶었던 도모키는 자신을 범죄 동료로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아와노의 끈질긴 설득에 못이겨 다시 범죄, 이번에는 보이스피싱 같은 시시한 범죄가 아니라 좀 더 판이 큰 유괴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대유괴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달고, 올해를 일본의 유괴원년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이들의 유괴사업은 '유괴는 하지만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다. 유괴해서 멀쩡하게 인질을 풀어주지만 경찰 몰래 스스로의 의지로 돈을 입금하게 만든다.  이들은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한 범죄자들이 아니다. 어느 정도 사회성을 갖추고 있고, 지성도 있다. 범인에게 유괴되어 함께있는 몇 일 동안 인질은 이들의 인간적인 면을 느끼고, 어느 정도는 신뢰하기도 한다. 


도모키 일당에게 아들과 함께 유괴당했다가 혼자 풀려난 미나토당의 미즈오카 가쓰토시 사장은 아직 그들 손에 있는 아들을 구해오기 위해 어떻게든 경찰 몰래 범인들에게 일억엔을 전달해주어야 한다. 경찰은 그들의 본분대로 일본 사회를 어지럽힐 수 있는 범죄일당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경찰에 무심코 맡겼다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에 망설이는 미즈오카 사장과 범인을 꼭 잡아야 하는 경찰과 경찰 몰래 돈을 꼭 받아내야 하는 도모키 일당의 숨막히는 삼각 줄다리기는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앞서 말했듯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을 만큼 삼자 모두 자신만의 굳건한 이유와 이해관계가 있다. 립맨은 그 줄이 팽팽해서 더 읽는 재미가 있다. 



가쓰토시는 사원과 함께 이를 악물고 애쓴 덕에 경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의 이익도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도모키처럼 입사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자를 포함해 정리해고로 잘린 사람이 수십명은 있다. 그들은 착실히 일했다면 얻었을 벌이와 생활 기반을 잃고,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해를 봤다. 미나토당의 회복된 업적은 그 희생 위에 세워졌다. 

그것과 도모키가 손댄 범죄는 무엇이 다를까. 보이스피싱이든 몸값을 노린 유괴든 누군가를 희생으로 이익을 얻는 점은 가쓰토시가 사장으로서 한 짓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지 않은가. 도모키의 행동이 명백한 범죄고, 가쓰토시의 행동이 경영 판단이라는 단순한 차이뿐이다. 가해 의식이 적은 만큼 오히려 가쓰토시 쪽이 질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 p.219>



물론 범죄자들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합리화는 어느정도 억지스럽긴 하다.  피해를 봤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각자가 나름의 억울한 점이 있고, 합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소설 전체가 끝까지 흥미롭게 이어질 수 있었던 듯 하다. 


소설이 마무리되고 끝 부분에 저자가 보이스피싱에 대해 참조한 책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살짝 웃었다. 보이스 피싱에 대한 책이 이렇게 많다니!! 보이스피싱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만 책을 5권 이상 읽었나보다. 그래서 그런 실질적인 수법들이 소설에 쓰여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행여나 이 책을 보고 우리나라의 보이스피싱이 더 발전한다거나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을 속여서 그 신뢰감을 바탕으로 사기를 치는건 정말 나쁜 짓이다. 근데 얼마전 OCN 드라마, 멋진 서인국이 나왔던 <38사기동대>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사기는 분명 나쁜건데 멋져 보였단 말이지. 이렇게 범인에게 공감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범인에게조차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시즈쿠이 슈스케 또한 독자에게 사기를 친 듯 하다. 이렇게 착한 인물들 사이의 심장 쫄깃한 범죄소설이라니! 범인에게 고한다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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