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인생 최고의 책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과연 나는 무슨 책을 고를까? 과연 내 인생을 흔들고 바꿀만한 일생 일대의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책 한권을 고르기가 과연 쉬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골똘히 생각해봐도 딱 한권을 집어서 말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요즘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소설 하나가 있다.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양귀자의 <모순> 이라는 소설인데 화자가 엄마와 이모의 정반대의 삶을 비교해 이야기 하면서 우리 삶의 이상한 모순을 이야기 하는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순>이라는 책에서  '살면서 이 책을 반드시 한번 더 펼쳐볼 것'이라는 말을 본 것 같다. 정말로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이 소설을 기억하게 될지 몰랐다. 아마도이 책이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이 던지는 농담과 거대한 아이러니를 직접 경험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책이 나에게 색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는 그런 때이다. 그 책의 이야기가 꼭 내 얘기 같을 때!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책이라니, 저는 그런 책을 고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키키가 말했다. "언제 책을 읽느냐, 어느 때 어떤 상태로 책을 읽느냐에 따라 그 책이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거든요. 말하자면, 기분이 나쁠 때라면 <길 위에서>나 <삼총사>같은 책을 읽어요. 그러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거나 생각이 달라지면, 그때는 그 책이 제일 중요한 책이죠. 그때는요."

<p.353>


이 소설은 주인공 에이바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곁을 떠나자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친구 케이트에게 부탁해서 가입하게 된 북클럽에서 사람들과 함께 읽는 책 이야기와 함께 진행된다. 1년이라는 시간동안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매달 한 권의 책을 선정하여 함께 읽게 되는데 올해의 책 선정 주제는 멤버 각자의 '내 인생의 최고의 책' 을 소개하는 것이다. 북클럽 사람들이 선정한 책은 한결같이 너무나 유명하고 익숙한 고전소설이 대부분인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유명한 소설들이다. 여기서 소개된 소설 들 중 내가 읽은 책은 부끄럽게도 2권밖에 없었는데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었다. 다른 소설들은 대충 줄거리는 알지만 읽어본 적은 없는, 말 그대로 누구나 알지만 읽어본 사람은 없다는 고전 책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들을 소개하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책들 속에서 자신의 삶과 비슷한 부분을 봤거나, 혹은 그로 인해 크게 위로받은 경험 때문에 그 책들을 소개한 이유가 큰 것 같았다. 어쩌면 고전은 어떤 특수한 시대에 쓰여졌더라도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잘 나타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읽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청소년의 반항이야기가 잘 드러나 있었는데 요즘 애들이 참 버릇이 없다지만, 그건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언제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에이바도 <호밀밭의 파수꾼>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자신의 반항적인 딸 매기를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소설은 매달 해당되는 소설에 대한 독서토론 장면과 함께 에이바의 딸 매기의 방황 이야기, 1970년 여름 어느 날 아침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목이 부러져 목숨을 잃은 에이바의 동생 릴리, 딸을 잃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1년뒤 동생을 따라 세상을 떠난 에이바의 엄마 이야기등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어릴 적 사랑하는 동생과 엄마를 거의 동시에 잃어 상심하던 에이바는 누군가가 전해준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라는 소설을 수도없이 읽으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북클럽의 11월 추천책으로 에이바는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를 추천한다. 하지만 너무 옛날에 출판된 책이고 절판된 이후 작가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어 사람들이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며 다른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에이바는 자기도 모르게 저자를 초청하기로 했다며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책 저자 로절린드 아든을 찾기 시작하는 에이바는 점점 놀라운 사실들을 알아가게 되는데.. 이 내용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추리소설 처럼 흥미진진하게 표현되니 책으로 직접 보시길.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는 이런 내용이다. 한 가족이 막내딸을 잃고 나서 남은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됐는데 거기서 아빠가 잠시 다른 곳에 간 사이 엄마와 딸은 우연히 바닥으로 이어진 기나긴 계단을 발견하고 끝없이 걸어들어간다.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이 들어가자 세상을 떠난 막내딸이 흐릿한 영혼의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엄마는 딸을 꼭 껴안고 자기는 돌아가지 않겠으니 남은 딸에게 혼자 돌아가라고 말한다.  




자리에 앉아 쌉쌀한 맥주를 홀짝거리자니 에이바의 생각이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해 여름날과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로 흘러갔다. 소설 마지막에, 엄마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느니 죽은 아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 때문에 에이바는 밤에 잠을 잘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엄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엄마라는 사람이 대체 어떻게 자기를 절절히 필요로 하는, 살아있는 자식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엄마가 남은 식구들을 등지고 다리에서 뛰어내린 것이 작중 엄마와 동일한 선택이었다는 걸 당시에 그녀가 알았던가? 아마도 어떤 차원에서는 알았겠지만, 어쨋든 오늘 밤 여기 앉아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양극단과 그 선택을 생각하다보니 지금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p.382>



어찌보면 아주 잔인한 이야기다.  동생을 잃은 것도 남은 아이에게는 충격일 텐데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동생과 함께 하기 위해 남은 딸을 돌려보내고 혼자 목숨을 버린 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에이바는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은 소설 속 남은 딸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같이 슬퍼하며 여러 날을 사무치게 아파했을 것이다. 에이바는 그 뒤로 다른 책들과도 멀어졌다. 에이바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을 쓴 저자 앤 후드는 다섯 살짜리 딸을 급성 질환으로 단 며칠만에 잃고 나서 한동안 그 충격으로 글을 전혀 읽을 수 없게 되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일년 동안 상심과 치유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 첫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나서 이런 글을 남겼다. 



책을 한 권 샀다. 그런 뒤 집에 가서 소파에 앉아 책을 코 밑에 올리고 깊이 냄새를 들이켰다. 그 냄새는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책을 펼쳐서 끝까지 한숨에 읽었다. 그러고 나서 울었다. 잃어버린 딸을 생각하며 울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생각하며 울었다. 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생각하며, 말이 주는 위로를 생각하며, 끝없이 부서졌다 치유되는 인간의 마음을 생각하며 울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p.478>



이 책은 고통받는 인간이 책을 통해, 혹은 책을 통해 이어지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고통받고, 자신만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살면서 겪는 세부적인 아픔에 대해 일일히 누구에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비슷한 삶의 미세한 결들과 아픔을 소설 속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되면 꼭 나를 위한 책 같고, 그런 사실만으로 위로 받기도 한다. <절망독서>라는 책에서 절망은 절망으로 치유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같은 아픔을 지닌 말과 글에서 위로 받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나이와 직업으로 구성된 북클럽이 무척 부러웠다. 누군가와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토론하고, 마음을 공유하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다. 책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아주 개인적인 매체라서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고 깊은 토론을 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바가 북클럽에서 다양한 책과 사람들을 통해 서서히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고 뿌듯했다. 


세상에 책이라는 것이 있어서 참 다행이고, 고맙다. 저마다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글로써 사람과 사람사이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줘서. 내가 느끼는 아픔과 상처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서. 난 오늘도 책을 읽으며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행복하게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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