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듣는다 - 정재찬의 시 에세이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마치 글자가 음표처럼 훌훌 날아 내 귀에다 속삭이고, 좋은 노래를 골라서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가 자꾸 멈추고 저자가 말하는 노래를 찾아서 들어보고, 저자가 소개한 시구절이나 소설의 구절들을 곱씹어가며 읽어보기도 했다. 시 에세이라고 해서 시에 대한 얘기만 있을 줄 알았는데 좋은 노래 가사들, 소설의 좋은 구절들,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들, 심지어 예능프로의 한 장면까지 다양한 장르를 끌어와 주제에 맞게 흥미롭게 얘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사전 정보 없이 바로 접했으면 관심 없이 넘어갔을만한 노래 가사나 시들이 저자 정재찬의 스토리텔링과 버무려지니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가볍고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에 대해, 고독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주제들로 구성되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쯤엔 알찬 선물세트를 한아름 받은 기분이었달까. 


책을 읽다가 가수 송창식의 <나의 기타이야기>라는 노래를 찾아서 들어봤다. 그리고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찾아 들었다. 어디선가 이름은 들어본 노래들이지만 너무 옛날노래라 잘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들이었다. 유튜브에서 이들의 노래를 찾아 듣는 순간 '정말 시가 노래가 되었구나, 진짜 아름다운 노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 시와 노랫 가사들을 새삼 더 아름답게 일깨워주는 책이라 풍성한 마음이 들었다. 


시에서 이야기만 추려 읽는 것은 충분한 일이 못 된다. 우리는 시인의 목소리를 읽고, 침묵하저 읽어야 한다. 말한 것과 말한 것 사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 말로 하지 못한 것까지, 아니 시인 자신도 모르는 것까지, 보이지 않는 암흑까지 경청하며 읽어야 한다. 

-그대를 듣는다 p. 71-

보통 '시'라는 것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친절하게 무슨 내용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읽으면서 시 구절 사이사이 자간이나 단어에서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느낌을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그런 막연한 시에 대해 저자 정재찬은 우리가 좀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준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강> 

....(중략) 
너무 야멸치고 매몰차다고? 여전히 넌 내말을 허투루 듣는구나.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는 내 마지막 말이 청유형으로 끝나고 있음에 너는 유의하지 않는구나. 친구야, 그 강에 나도 같이 갈 거란다. 어쩌면 너보다 더 미치고 싶은 이야기를 강에다가 퍼붓고 오려는 거란다. 복장 터지는 이야기, 애간장 저미는 사연, 너에게 아니하고 저 강에다 실컷 부려 놓으려는 것, 그러니 강가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말자는 게다. 눈 마주치면 행여나 서로에게 이야기할까 봐 그러지 말고 우리 두 사람 함께 저 강, 같은 곳을 향해 같이 푸념하려는 게다. 너나 나나, 목숨 붙은 인간이란 영락없이 죄다 고독한 존재, 이만한 우정과 위로, 연민이 달리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 네 외로움을 나에게 말하지 말아다오. 제발 부탁이다 친구야. 

p. 125 ~127
너무 매몰차 보이는 이 시를 세세히 이야기로 뜯어보니 괜히 가슴이 아파오는 건 왜일까. 살면서 외롭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힘드냐 나도 힘들다 라고 말하는 대신 매몰차게 나도 힘들다, 우리모두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니 그만한 위로가 어디 있겠냐고 말하는 저 시 속에서 오히려 약간은 위로를 받는다. 시가 직접 말해주지 않은 것들을 저자가 이야기로 풀어서 얘기해준 내용들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대해 '이건 진짜 맞는 말이다!!' 라고 무릎을 쳤던 구절이 하나 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라고 정의했다. 사실 남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럴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칩거 생활을 하는 것은 고독이 아니다. 외톨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구절에 동의한다.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라고 말했다.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엄습한다.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 장혜경 옮김<<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중에서  


- 그대를 듣는다 p. 135-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외톨이로 취급되는 것이 훨씬 힘든 일이라는 것, 그래서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매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더 외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렇지만 외로움이라는 말과 달리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난 고독함을 좀 즐기는 것 같다. 물론 완전 혼자일 순 없지만 혼자만의 외로움과 시간을 어느 정도는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니까 ㅋ 


'그대를 듣는다' 에는 곳곳에 공책에 따로 옮겨적어 간직하고 싶은 시와 아름다운 노랫말이 넘친다. 노래에서 음을 빼고 가사만 보니 그저 아름다운 시인 노래들이 참 많다. 특히 송창식의 나의 기타이야기 는 이번에 처음 들어본 노래였는데 노랫말만 들어도 클래식한 영화한편이 생각나는 아름다운 노래라서 자꾸 흥얼거리게 되더라. 


옛날 옛날 내가 살던 작은 동네엔 / 늘 푸른 동산이 하나 있었지 / 거기엔 오동나무 한 그루하고 / 같이 놀던 소녀 하나 있었지 / 널따란 오동잎이 떨어지면 / 손바닥 재어보며 함께 웃다가 / 내 이름 그 애 이름 서로서로 / 온통 나무에 이름 새겨 넣었지 


하늘이 유난히도 맑던 어느 날 / 늘처럼 그녀의 얼굴 바라보다가 / 그녀 이름 새겨 넣은 오동나무에 / 그녀 모습 담아보고 싶어졌지 / 말 할때는 동그란 입하고 / 가늘고 길다란 목도 만들고 / 아 잘쑥한 허리를 똑같이 만들었을 땐 /  정말 정말 너무 너무 예뻤지 


사랑스런 그 모습은 만들었는데 / 다정한 그 목소리는 어이 담을까 / 바람 한 줌 잡아 불어넣을까 / 냇물 소리를 떠다 넣을까 / 내 가슴 온통 채워버린 그 목소리 때문에 / 몇 무릎 몇 손이나 모아졌던가 /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에 / 몇 밤이나 울다가 잠들었던가 


어느 날 그녀 목소리에 깨어나보니 / 내가 만든 오동나무 소녀 가슴엔 / 반짝이는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지 / 하나둘 여섯줄기나 흐르고 있었지 / 오동나무 소녀에 마음 뺏기어 / 가엾은 나의 소녀는 잊혀진 동안 / 그녀는 늘 푸른 동산을 떠나 / 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던거야 



후렴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 / 나의 지난 날의 사랑이야기 /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 딩동댕 딩동댕 울린다. 


송창식 작사,작곡 < 나의 기타 이야기> 


-그대를 듣는다 p. 53 ~ 59- 

책을 읽고 순간 취향이 좀 올드해 진 듯도 하지만, 이런 시 같은 옛 노래를 들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분이 든다. 나만을 위한 특별 라디오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몇시간동안 나를 위해 속삭이는 재미나고 특별한 라디오를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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