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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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새로운 소설이 나왔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면서 필사적으로 붙잡고 싶어했던 사랑하는 이들과의 기억. 사람이 늙어서 죽어갈 때 자신이 살아온 모든 기억마저 다 사라지는건 어떤 의미일까. 


솔직히 누군가에게 보일 목적으로 시작한 원고가 아니었다. 나는 글로 적어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냥 내 생각을 글로정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쓰다보니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서서히 잃는 심정, 아직 내 곁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내 아이들에게 그걸 설명하고 싶은 바람을 담은 짧은 글로 발전했다. (...)

이것은 거의 한 쌍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 작가서문에서-

 

  

이 책은 동화같은 짧은 분량과 책 속 곳곳의 예쁜 일러스트와 함께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기억들, 기억들이 저장된 세계가 작아져 가고 있는 하루하루를 환상처럼 표현한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생각났다. 사랑하던 남녀가 헤어지고 그 이별이 너무 힘들어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에서 이별의 기억을 지운 남녀가 각자 떠난 여행지에서 다시 만난다. 기억을 지워 그들은 서로를 못 알아보지만 자석처럼 이끌려 다시 사랑하게 된다. 책 속에서 할아버지가 노아에게 "내가 기억을 잃어 너를 못 알아보게 되면 어쩌지?" 하고 묻자, 노아는 그래도 괜찮다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친해질 수 있을거라고 말한다. 사랑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 이끌림에 가까운 걸까. 



머릿속의 어지러운 기억들 속에서 할아버지는 사랑했던 것 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너무나 소중한 기억은 소멸의 빗속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꽁꽁 숨겨두고 아껴둔다.  할아버지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머릿속의 기억의 광장에 앉아 손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이 제일 좋을때지. 

노인은 손자를 보며 생각한다. 

세상을 알만큼 컸지만 거기에 편입되기는 거부할 만큼 젊은 나이


할아버지는 손자의 이름을 남들보다 두 배 더 좋아해서 이름을 두번 붙여서 꼭 '노아노아'라고 부른다. 두 배 더 좋아해서 '노아노아' 라고 부르다니 할아버지가 너무 귀엽다. 손자 노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몇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머릿속에서 사랑스러운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이자 노아의 아빠인 '테드'에게는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평생 숫자를 좋아해서 집 앞에 있는 버려진 배를 연구소로 개조해 하루종일 틀어박혀 숫자의 논리성에 푹 빠져있느라 아들과 놀아주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어쩌면 그 미안함 때문에 손자에게 더 사랑을 주고 오냐오냐 하게 되는 것 같다고도 말한다. 



"선생님께서 어른이 되서 뭐가 되고 싶은지 쓰라고 하셨어요. "

노아가 얘기한다. .

"그래서 뭐라고 썼는데?"

"먼저 어린아이로 사는데 집중하고 싶다고 썼어요."

"아주 훌륭한 답변이로구나."

"그렇죠? 저는 어른이 아니라 노인이 되고 싶어요. 어른들은 화만 내고, 웃는건 어린애들이랑 노인들 뿐이잖아요."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돌아볼 여유가 생기나보다. 당장 눈앞의 일에 치여 앞만 보고 달리던 그때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나이가 들고 세상을 점점 알아갈 수록, 그리고 그 세상과 이별할 때가 점점 다가올 수록 더 잘 느껴지는 걸까. 할아버지는 평생 논리를 추구했기에 아내가 하느님을 믿어서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의 말이 '정말로 정말로' 사실이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사후세계란 것이 있다면 거기서 아내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 점점 어른이 되고 늙어갈수록 다시 아기로 돌아간다는 말이있다. 무의 상태로 태어나 다시 무로 돌아가는 인간의 일생. 그 안에서 사람은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면서 나이들어 간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자신이 가진 일생의 기억과 추억으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때 그 기억마저 뺏어가는 '치매' 라는 병은 참으로 신의 장난 같은 병인 것 같다. 

추억할 만한 기억이 사라지고,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을 못알아보는 것, 거기에 더해 점점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죽기 전에 이미 완벽한 '무의 상태' 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건 아닐까?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은 슬프다. 더군다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런식으로 잃어가는 과정,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들은 아름답고도 지독히 괴로운 날들이기도 하다.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또 그런 슬픔들을 잊고 점점 자신의 생활을 찾아간다. 이렇게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이 가장 아려운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이 세상과 이별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낸 책이다. 기억을 잃어서 아침마다 이 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두려워할 때, 매일 옆에서 나에 대해, 내 추억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들과 매일 이별을 준비하며 죽기전까지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주아주 축복받은 이별인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면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날카롭고 괴팍한 늙은이가 되는 대신, 내 생을 평화롭게 추억하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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