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감독이 이렇게 솔직하게 망가져도 돼? 읽는 내내 솔직하고 찌질한 감독의 모습에 쿡쿡 웃게 되는 에세이다. 이경미 감독을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다. 동료 영화감독들과 함께 한 쇼 프로그램 자리에서 조곤조곤 자신의 의사를 똑똑히 잘 밝히던 모습이 뇌리에 남아있었는데 이 책으로 이경미 감독의 코믹한 부분까지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코믹함은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감독의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 그 자체다. 지난 10여 년간의 일기와 메모를 모아서 책으로 낸 것이라 혼자만의 웃프고 짠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영화감독의 일이라 함은 촬영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고 스텝과 배우들을 진두지휘하며 카리스마를 뿜뿜하는 직업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맨날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이 훨씬 더 긴 직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런데 이경미 감독이 막상 영화감독이 되게 된 진짜 이유를 들어보면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 사람은 인생이 시트콤이구나 싶어서 ㅋㅋ 

「그래서 '어떻게 영화감독이 됐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 창피하다. '오래 사귀던 남자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절 버렸거든요. 그래서 홧김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해버렸어요. 회사 다니기 너무 싫었는데 좋은 핑계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만 부모님께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였죠. 마치 평생의 꿈이 영화감독인 사람처럼.' 이렇게 대답할 순 없단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미쓰 홍당무> 이야기를 만들게 됐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단 한 번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유부남을 짝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내 친구랑 바람이 난 거예요. 그래서 열받아서 썼어요. 영화 죽이게 만들어서 그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었다구요!'
이렇게 대답할 순 없지 않나.」
<잘 돼가? 무엇이든 p.106>

어쩌면 이 사람은 삶에 무슨 일이 찾아와도 이런 시트콤 같은 이유를 찾아서 유쾌한 일기를 쓰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살면서 괴롭고 남부끄러운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걸 숨기면 숨기려 들수록 사람은 움츠려들기 마련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다 까발리는 모습이 자못 통쾌하고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가 된다. 

책 표지에 나와있는 '힘들지? 우리 좀 웃고 가요.' 이 책의 내용에 참 잘 어울리는 문장이다. 개그맨도 아닌 대중에게 알려진 여자 영화감독이 이토록 솔직 담백하게 자기를 망가뜨려 웃긴 에세이를 썼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꽤 사랑스럽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 시트콤처럼 재밌어 보이는 건 그 사람이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 때문이다. 시트콤을 보면 보는 사람은 웃긴데 본인은 엄청 진지하지 않은가. 웃긴 상황에도 오히려 등장인물이 너무 진지하기에 더 웃기지 않은가. 《잘 돼가? 무엇이든》에서 이경미 감독은 자기 딴에는 혼자 엄청 진지하다. 그 솔직한 모습을 보는 독자들은 그 모습이 너무 웃긴 거다. 그 절묘한 포인트를 잘 잡아내서 웃기면서도 자기의 매력을 잘 끌어낸 에세이였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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