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새하얀 종이 같았던 청소년기, 그때 느꼈던 미래란 어쩌면 미지의 세계 같은 거였을지 모른다. 장차 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또한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내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인지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었던 때였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 나는 나름의 심각함을 안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던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나 여물지 않은, 순수하다 못해 좀 부끄러워지는 시절인 것이다. 그 푸릇푸릇한, 만지면 톡 터질 것처럼 청량감 있는 청소년 시절은 반드시 시간이 오래 지나야지만 '그때가 좋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누구나 지나쳐온 하나의 터널일 것이다. 

여기에 자신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주인공 '에이자 홈즈'가 있다. 실제로 그녀는 이 소설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에 등장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도 아닌 단짝 데이지의 친구역을 맡은 조연이라고 생각한다. 에이자는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지만 한가지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세균이 자신의 몸에 침투해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레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가운뎃손가락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찍어눌러 피를 내고 반창고 붙이기를 반복하는 소녀이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예를 들면 세균 같은 것)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고, 자신은 환경에 지배당할 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

「"전 제 생각을 통제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 생각들은 진짜 내가 아니에요. 난 땀을 흘릴지 말지, 암에 걸릴지 말지, 클리스트리디움 디피실레에 감염될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내 몸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죠. 이들 중 어느 것도 내가 결정하지 못해요. 외부의 힘이 결정하죠. 그러니까 난 그냥 소설 속 인물인 거예요. 내가 곧 환경이라고요."」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p.182>

스타워즈를 좋아해 그 분야의 팬픽을 써서 나름의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에이자의 친구 데이지는 그에 반해 조금은 더 적극적인 아이로 보인다. 자신이 작가가 쓰는 대로 움직여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에이자와 달리 데이지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위치에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절친 소녀의 모험 이야기가 전개될 것처럼 소설이 시작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 시절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다. 데이지와 에이자는 옆 동네에 사는 억만장자 CEO 러셀 피킷이 실종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를 찾는 자에게 현상금 10만 달러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종된 러셀 피킷의 아들 데이비스와 어릴 적 친구인 에이자는 혹시 모를 기대를 품고 데이지와 함께 친구 데이비스의 넓은 저택을 찾아간다. 그렇게 다시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너 자신이 막 미워? 너로 사는 게 싫어?"
"미워할 '나'조차 없어. 내 안을 들여다보면 진짜 '나'가 없어. 그저 생각과 행동과 환경만 한 다발 있을 뿐이지. 그리고 그 대부분이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생각 혹은 하고 싶은 행동이 아니야. '진짜 나'는 어디에도 없어. 마트료시카 같아. 안이 텅 비어있고, 열어보면 더 작은 인형이 나오고, 그 인형을 열어보면 또 더 작은 인형이 나오지. 제일 작은 인형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그 인형은 실체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실체가 없어. 그저 계속 작아질 뿐이야."」 <p.267>


「그렇게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체의 역사에 대해 연설하고 끝으로 관객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뒤에 앉은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했지. '잘 들었습니다, 과학자 선생님. 하지만 사실 지구는 거대한 거북이 등에 세워진 평평한 땅이랍니다.'
과학자는 할머니를 골려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었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거대한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답했지. '더 거대한 거북이가 있죠.'
(중략...)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구나."
"거북이들만 존나 있는 거야, 홈지. 넌 맨 밑에 있는 거북이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왜냐하면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으니까." 나는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 
<p.268>

책을 읽다 보면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는 떡밥일 뿐 핵심은 딴 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트료시카 인형, 거북이 밑에 끝없이 이어지는 거북이, 또 에이자가 겪는 한없이 좁아지는 나선형에 갇힌 기분 같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인생의 첫 출발점에서 겪는 다양한 혼란과 철학적인 고민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건 어쩌면 사랑과 우정이 아닐까. 

「네가 첫사랑을 기억하는 이유는 네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이 세상에서는 오로지 사랑만이 가치 있음을, 사랑을 통해 그리고 사랑 때문에 네가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첫사랑이 보여 주고 증명했기 때문이지. 」
<p.311>

세상에 태어나 '나'라는 본질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는 존재가 어쩌면,
바로 사랑이라는 녀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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