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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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읽으면서 수없이 답답함을 느끼고, 덮었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윈스턴이 당에 잡혀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읽다가 잠든 날엔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집단이 한 인간을 이토록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모든 생활상의 움직임을 비롯해 말과 생각, 심지어 혼자 쓰는 일기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세상, 그것이 조지 오웰이 봤던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이었다. 1984년, 사실 이 숫자는 내게 특별한 숫자다. 바로 내가 태어난 연도니까. 유명한 소설의 제목으로도 쓰이고, 기안84처럼 예명으로 쓰이기도 하는 숫자라 괜히 뭔가 특별한 해인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소설 속 1984년은 아마 조지 오웰이 본 미래의 어느 해 중 그나마 제정신을 가진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진 해를 뜻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미명 아래 전혀 평등하지 않은 삶을 살고, 빅브라더가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오로지 당은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미래이다. 

「오웰은 일찍이 버마에서 제국주의적 참상을 목격했고, 영국 북부 지방의 탄광촌에서 광부 노릇을 하며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체험했으며, 스페인에서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파시즘이 다시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스탈린 등장 이후 노동자들의 초기 혁명 정신이 사라지고 전체주의적 정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줄곧 주시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확고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에서 실망한 사회주의자의 모습으로 돌아선다. 이후 나온 <동물농장> 과 <1984년>에 당대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비극적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역사 해설 중>

책을 읽으며 조지 오웰이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주의가 여러 나라에서 결국엔 전체주의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사회주의의 어두운 면을 세밀하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권력을 잡은 인간의 욕심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소설 속에 드러나는 영국 사회주의의 모습은 상상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같아 소름 끼치고, 가슴을 갑갑하게 조여오고 실제로 읽는 내내 불안하다. 

「부가 일반화된다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인 소유와 사치라는 측면에서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고 <권력>이 소수의 특권 계급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실제로 오랫동안 안정된 상태를 유지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여가와 안녕을 똑같이 향유하게 된다면, 빈곤에 의해 무감해진 많은 대중들은 교양이 생기게 되고, 따라서 혼자 사색이 가능하게 되며, 이 단계를 지나면 조만간 소수의 특권층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특권층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계층 사회는 빈곤과 무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문득,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어떤 교육부 고위장관의 발언이 생각난다.
 "민중은 개 돼지!"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교육을 책임지는 높으신 분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숨겨진 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었다. 어쩌면 소름 끼치는 진실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받는 학교 교육이 사회에서 거의 쓸모없는 이유가 혹시 그런 것인지 하는...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당원으로서 진리부에서 일하고 있다. '진리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는 당이 최근에 발표한 내용과 다른 과거의 기록을 조작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최근 당이 유라시아와의 전쟁에 대해 발표를 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이스트 아시아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여왔던 것이 없던 일이 되고, 당은 계속해서 유라시아와만 전쟁을 벌여왔던 것으로 기록을 바꾼다. 당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당원들은 집에서 혼자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될 수 있다. 후대에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는 글을 개인이 남기는 것은 엄청난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그리고 거의 매 순간마다 과거는 현재가 되어비린다. 이런 식으로 당이 발표한 모든 예언은 문서상으로 옳다고 증명되고, 그때 필요하지 않은 뉴스 항목이나 의견 표출은 기록상으로 절대 남겨지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깨끗이 지웠다가 다시 쓰는 양피지와 같은 것이다. 일단 이런 작업이 행해지고 나면 거기에 허위가 개입되어 있다고 증명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당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사고의 폭을 제한하는 신어를 만들어 언어의 쓰임을 제한하고 그로 인해 민중들이 언어로 다양한 생각을 펼치는 것 자체를 막고, <이중사고>라는 생각법을 교육해 어떤 사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모순적인 두 개의 생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결국 모든 민중을 바보로 만들어 조종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어는 주로 바람직하지 못한 어휘를 삭제하고, 비정통적 의미를 담고 있는 어휘를 제거하고, 가능한 한 어휘의 2차적 의미를 없애 버림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자유로운 free>이라는 어휘는 신어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 개에는 이가 없다 This dog is free from lice>, 혹은 <이 밭에는 잡초가 없다 This field is free from weeds>라는 문장에서만 사용될 뿐이다. 이 어휘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politically free>, 혹은 <지적으로 자유로운 intellectually free>이라는 옛날의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지적인 자유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소설 속 당의 지배 방법을 보면 언어로 인한 지배가 많다. 과거 기록을 조작하고, 신어를 만들어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고, 개인의 글쓰기를 제한하고, 사상범을 고문하는 방법도 대부분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게 만드는 방법을 쓴다. 그만큼 언어와 글이 인간의 생각을 크게 지배하기 때문이리라. 책 한 권이 사람의 생각을 확 바꿔놓기도 하는 것처럼. 

사실 <1984년>은 한편의 리뷰로 대신하기엔 할말이 너무 많기에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아마 끝도 없을 것 같다. 전체적인 내용의 촘촘함이 남다르고, 충격적이면서도 계속 곱씹어 보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아서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분명히 있다. 
거기다 이야기의 흐름도 마치 스릴러처럼 아슬아슬함을 가진 채 흘러가기에 단지 재미를 위해 읽는다손 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열린책들의 번역 또한 깔끔한 편이라 읽기에 나쁘지 않다. 

특히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꼭 읽어봤으면 한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뒤에 사회에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천지 차가 있을 테니까. 

나도 좀 더 빨리 읽을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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